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 논설위원

세월은 정녕 낙엽이 떨어지듯 상실만을 남기고, 그냥 그렇게 떠나가는가. 생각도 하기 나름으로, 굳이 그렇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지 않을까 싶다. 되레 늙어가며 더 편하고 자유롭고 한결 더 여유로워진 것 같은 이 느낌은 또 어쩌고. 

올해 98세의 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그의 저서 「100년을 살아보니」에서, 인생에 있어 가장 창의적이고 찬란한 시기는 60~75세였다고 회고한다. 여기에다 개인의 건강 여하에 따라 10년쯤은 더 늘일 수 있다니 더욱 희망적이다. 

필자의 경우도 젊은 시절에 비해 지금이 되레 '생각의 세계'가 한결 더 넓어진 것 같다. 필자는 이것을 세월이 남기고 간 큰 선물이라 여기며, 주어진 나날을 즐기며 살아간다. 나이 들어가며 생각해보니, 이제 필자에게 있어 진정 소망스런 것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다.

글줄이나 긁적이고 카메라를 만지는 게 내게는 참 소중한 낙(樂)이다. 글쓰기는 오랜 세월 꾸준히 이어져 온 터이지만, 분위기나 여건 면에서 퇴직하고 난 지금이 보다 안성맞춤이다. 카메라는 대학입학 선물로 받은 중형 후지(Fuji)로 인연을 맺었으니 무려 50년도 넘는 커리어를 가졌지만, 그럭저럭 필름시대는 정 주지 못하다가, 디카시대가 열리고 퇴직을 앞두고서야 회심의 한 여나믄 해 남짓 부산을 떨고 있으니, 실력은 영락없는 초심자일 수밖에. 어쨌든 필자에게 있어 이 두 가지는 늘 필자의 빈약한 창의적 상상력을 일깨워주는 아주 유익하고 소중한 벗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늙어가면서 사려 깊게 처신해야 할 일들도 적잖다. 우선 어느 자리에서든 부탁받지도 않은 '인생의 조언'을 삼갈 일이다. 한낱 선배텃새로 비쳐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경륜'은 '지혜'와 값을 엇비슷하게 쳐주기도 했고, '나이'는 여러 사회적 척도들 중에 비교적 신뢰도 높은 가치기준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옛날 생각만 하다가는 자칫 퇴물로 매도되기 쉬운 세태인 걸 어쩌랴. 

어쨌거나 생각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삶이란 막춤을 추듯이, 개념없이 아무렇게나 바보처럼 막 사는 삶이다. 영국의 정치평론가 디즈 데일리는 바보도 등급이 있으니, 그중에 최악은 신념과 고집이 겹친 경우라나. 그냥 웃어넘기기엔 어딘가 뒷맛이 서린다. 진짜 바보는 이끄는 대로 따라오기나 한다. 

이거 고집스런 성품에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소위 신념이란 것으로 구색을 맞춘 바보는 정말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다. 무식한 사람이 소신이랍시고 뚝심을 갖고 열심히 일하면 정말 별 도리가 없는, 이른바 사회적 폐해가 아닐 수 없다는 이면우 교수의 '사회공적(公敵)이론'이 생각난다. 그러기에 늙은이는 옳은 말이라도 지나치게 강변하는 걸 조심할 일이다. 자칫하다 젊은이들로부터 '보수꼴통'이란 훈장을 받게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사회 곳곳에서 '소통'이 화두가 됐다. 도쿄대학의 뇌 전문가인 요로 다케시 교수는 인간의 뇌는 자기가 알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정보를 차단해 버리는 구조적 특성이 있음을 밝힌다. 

반면 일단 자기 뇌에 자리 잡은 사실과 지식·정보는 고착시켜 버린다. 결국 이로써 두터운 차단벽이 생성되는데, 다케시는 이를 '바보의 벽'이라 명명한다. 너나없이 소통을 말하나 여전히 불통이 반복되는 연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바보 얘기 하나만 더 하자. 김수환 추기경 얘기다. 선종하시기 불과 이태 전, 모교 100주년기념전시회에 생전 처음으로 그린 드로잉과 판화 작품 몇 점을 내걸었는데, 그중 유독 자화상에다는 '바보야'라고 적어놓았다. 연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렇잖아요. 내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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