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지난달 28일 저녁 7시, 용담 해안도로의 한 카페, DJ 이상순이 만들어 낸 세련된 비트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전세계에서 온 로봇공학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들었다. 여기는 한국로봇학회(KROS)가 주최하는 국제학회 URAI(Ubiquitous Robots and Ambient Intelligence)2017의 VIP 파티 현장. 학술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만 익숙했던 로봇공학자들이, 막 런칭한 JTBC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 이야기를 하며, EDM과 보라색 조명 속에서 돔 페리뇽의 리미티드 샴페인을 즐겼다. 
 
로봇과 EDM

파티를 준비한 것은 걸스로봇 지원으로 학회에 참석한 국민대 이세리, 김연희 학생과 인간중심소프트로봇센터 소속 임소정(서울대), 휘트니 황(미국 프린스턴대), 로라 매트로프(미국 스탠포드대) 연구원이었다. 나는 URAI2017 조직위원회에서 로컬체어로 일했다. 지금껏 없었던 형식의 VIP 파티를 주관하고, 여성 기조연설자로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추천했다. 지역 출신 예술가인 백은주 작가가 100년 묵은 고목재와 공경철 서강대 교수의 부품을 활용해 만든 미술작품을 전시하도록 주선했다. 이 모든 것이 로봇공학자들이 보기에는 황당하고 무모한 시도들이었을 게다. 로봇공학은 가장 도전적이고 미래적인 학문이지만, 로봇공학자들은 어쩌면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에 속할 것이다. 아무나 쉽게 시도하거나 들어올 수 없는 분야라는 자부심도 높다.

박사도 교수도 연구원도 아닌 내가, 정식 학회에서 이런 실험들을 할 수 있었던 건, 다양성의 힘을 아는 리더 덕분이었다. 조직위원장 강성철박사(KIST)와 프로그램위원장 박재흥 교수(서울대)는, 준비기간 동안 나와 걸스로봇을 둘러싼 모든 오해와 우려들을 막아줬다. 이상순 DJ가이끈 파티와 노소영 관장의 감동적인 강연, 백은주 작가와 공경철 교수의 아름다운 콜라보레이션은 기간 내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근엄해 보이던 연구자들이 걸스로봇의 핑크부스에 몰려들어 질문과 격려를 쏟아냈다. 특히 미국,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온 해외 학자들이 한 줌의 다양성이 가져온 변화에 놀라워했다.

과학에 다양성을 허하라

학회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난주에는 새 정부 정책제안 자리에 섰다. '광화문 1번가: 국민인수위원회'라는 이름의 무대였다. 나는 걸스로봇의 대표로서, 또한 ESC라는 과학기술인 단체의 일원으로서, 30퍼센트의 여성 회원들을 대신해 과학기술계 젠더 이슈에 대해 말했다.당사자들의 이익이 달린 문제라 차마 직접 나서지 못하는 걸,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내가 대신하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4000여 개 기관을 전수조사해 온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이하 위셋)의 통계와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디지털살림분과장인 신하영 박사의 전문성을 빌리고, 과학기술중점대학 페미니스트 연합체 <페미회로>의 검토를 거쳤다. 위셋을 지금의 위셋으로 만든 문미옥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이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위셋과 미래부의 '2015년도 여성 과학기술 인력 활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로봇공학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기계/금속 부문 여성인력은 불과 6.2% 남짓이다. 수적 열세는 학문적, 문화적, 정치적 소외를 가져온다. 그래서 걸스로봇을 시작했다. 지표가 가장 나쁜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그 변화는 이공계 전체로 확장될 거라 생각했다. 여성들은 더 다양한 직업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더 넓고 평등한 세계로 진출할 수 있다. 로봇공학은 더 풍성해진다. 중요한 건 역시 리더의 의지다.

중세에는 엘리트 수도사만이 신학을 독점해 감히 '웃지도 말라'고 말했던 암흑기가 있었다. 오늘날 신학의 자리를 대신하는 세상의 중심에는과학이 있다. 누군가는 수도원에 스스로를 유폐하듯 진지하고 엄숙한 연구를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라틴어가 아닌 대중의 언어로 번역해 복음을 전파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영성을 간접 체험하고 증언하는 워크샵을 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과학을 빙자해 페미니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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