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로마에서 볼거리는 매우 많지만, 카타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시대에, 지하묘지에 숨어서 믿음을 지켰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어려운 때에 일시 피난처로 활용되었다는 추측은 수긍할 만하다. 지난 달 로마를 방문했을 때에, 도미틸라의 집터의 지하교회를 볼 수 있었다. 

도미틸라는 황제 도미티안(81-96)의 조카였다. 남편 클레멘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황제의 양자가 되고, 황위계승자로 결정되면서 이들의 입지는 오히려 좁아졌다. 동방에서 온 일신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클레멘스는 처형되었고, 도미틸라는 유배되었다. 황제의 부모가 국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는 것을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교회사에서는 이 부부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이해한다. 클레멘스는 신약성서에도 등장하고, 그가 남긴 서신은 거의 경전에 준하는 지위를 차지한다. 또한 황제는 요한을 귀양 보내었다. 그곳에서 집필된 계시록에서 666으로 통하는 네로황제는, 당시의 황제 도미티안을 암시한다는해석도 유력하다. 

후일,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사를 정리하면서, 도미티안은 네로에 이어 두 번째 박해 황제로 꼽혔다. 황제 중에서도 과도하게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를 강요하던 상황은 신앙인들에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 처형된 일은 위의 사실 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이런 면에서, 황제는 누명을 쓰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도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 입장을 취한다. 

황위 계승의 서열은 높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서른 살에 황제로 등극하였고 15년간 제국의 원수로서 통치하였다. 국경 정비와 수도 로마의 거대한 토목공사가 그의 재위기간에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대부분 지워지고, 나쁜 일들만 남았다. 비극적인 최후와 더불어, 기록 말살의 결정을 원로원이 택하였기 때문이다. 

황제는 유능한 행정관이었으며, 풍속과 도덕을 바로 잡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로원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시행하는 정책 혹은 집행하는 형벌의 사례들이 늘어갔다. 원로원의 불만은 누적되었다.   

황후 도미티아의 경호원 스테파누스가 주동이 되어 황제를 침실에서 갑자기 공격하였고, 소수의 암살자에 의해 곧 살해되었다. 뒤늦게 현장으로 출동한 경비대는 자객들을 현장에서 모조리 처형하였다. 사건의 진상은 규명되지 못한 채로 의혹만 남았다. 황후의 질투심에서 발전된 황제 부부의 대립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시오노 나나미는 추측한다. 

로마인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읽혔지만, 이 부분에서는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스테파누스는 도미틸라의 재산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처형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서 막다른 위기에 처한 여러 사람들이 연결되면서, 암살의 계획이 그 여름에 꾸며졌다. 오후 낮잠 시간에 스테파누스가 황제에게 떠도는 암살 음모를 고한다고 독대의 자리를 마련하여, 숨겨둔 단도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거사에 성공하였다.   

도미티아와 도미틸라는 표기는 다르게 보이지만, 실제 같은 이름이기에 혼동하기 쉽다. 하여간, 황제는 살해되었고, 원로원은 주도권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황제의 모든 기록을 없앤다는 보기 드문 결정을 내렸다. 혼란 중에도 그의 유모가 시신을 거두어 수습하였다. 그리고 그의 업적은 다른 황제의 치세에 일어난 일로 고쳐졌고, 황제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사 규명을 위한 작업들이 진행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탄신 백주년을 기념하는 우표 발행의 계획은 취소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재판하는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한다는 얘기도 있다. 역사 말살의 형벌은 오늘날에도 통하는 징벌이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나 어느 기관이 멋대로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