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우리 주변엔 대체로 무흠(無欠), 완벽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관리가 얼마나 철저한지 가벼운 옷매무새 하나에도 좀체 흠과 티를 보이려 하지 않는다. 격조 있는 자리에 나가는 것도 아닌, 그냥 툭 걸치고 나서면 그뿐인 산책길 차림에 마저도 그렇다. 이러한 특성은 고작 옷매무새 정도에 그치지 않고, 성격, 취미, 가치관 등 인격과 삶 전반에 걸쳐 고르게 묻어난다. 대화를 할라치면 한 마디의 문장으로는 말을 맺지 못한다. 이내 약간의 보충설명과 변명 등의 부연(敷衍)을 해야만 비로소 안심이 되나 보다. 소심한 건지 완벽한 건진 몰라도 비록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흠 잡히는 게 싫은가 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에서 허접하고 아쉽고 모자란 데가 더러 있으면 어떠랴. 속담에 '어두운 물에 고기가 논다.'했는데, 그렇다고 일부러 물을 어둡게 만드는 궁상을 떨 필요까지야 있을까 마는, 아무튼 그 말의 뜻은 새겨볼 만하다.  

이러한 성향은 과연 어디서 오는가. 혹 지나친 자존감의 상실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또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인간을 기계처럼 논리나 설계에 의해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지나친 완벽주의는 가당(可當)치도 않고 합당(合當)치도 않다. 사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그렇기에 트라이포드처럼 서로를 마주보며 기대어야만 비로소 온전히 설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오직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그렇다. 모든 것을 이미 다 얻은 사람, 그리고 다 이룬 사람이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있다 한들 그들하고야 무슨 재미로 인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이 고백, 「나는 아직도 미완(未完)이기에 오늘도 꾸준히 이 길을 달려갈 뿐」이라는 진솔하고 겸허한 이 인생행전(人生行傳)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시쳇말로 소위 스펙(spec)으로 치자면, 사도 바울이야말로 서슬이 시퍼렇던 로마천하에서 당당히 로마시민권을 획득한 유태인이요, 대 율법사 가마마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로마 총독도 그의 신병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가히 무흠, 완벽한 자였음에도 그는 이러한 독백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완벽주의, 그리고 무흠주의, 이는 어차피 이루지 못할 꿈이요 넘지 못할 산이다. 그러기에 언제나 가난한 맘을 지니고, 삶을 조촐하게 꾸려나가는 편이 훨씬 더 멋과 맛이 있을 법하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은 우리 모두가 가까이 하고 싶은 인간형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이러한 삶을 일컬어 행복한 삶이라 한다면 이것은 분명 막 찍어내는 공장제품이 아닌, 자기만의 가내공업으로 꾸려낸 「수제(手製)행복」이라 하리라.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재산>, <외모>, <명예>, <체력>, <언변> 등 다섯 가지 관점에서 조명한다. 즉, 그저 일상에서 먹고 입고 쓰기에 조금은 빠듯한 재물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엔 약간은 아쉬운 외모로, 명예래야 기대의 절반에도 채 못 미치는 조촐한 정도에, 혹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두 사람과 겨루기엔 조금은 버거운 체력에다, 말을 하면 객석의 절반정도나 박수 쳐 줄까 말까한 정도의 말주변을 지닌, 이처럼 소박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대로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이 철인이 그리는 행복이란 한낱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이 아닌가. 그럴진대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할 만큼의 소유도 소망도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으리.

내 경우, 잘 익어 퍽퍽해진 웰던(well-done)보다, 약간은 덜 익어 씹을수록 감칠맛을 더해주는 미디엄(medium)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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