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논설위원

오전 5시 30분, 멀리서 수탉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한 놈만 우는 건 아니다. 시작은 장닭이 하지만, 다른 네 녀석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목청을 높인다. 귀가 예민한 남편은, 못 듣고 자는 사람을 부러 깨우며 잠투정을 부린다. "당신 나가서 쟤네들하고 이야기 좀 해 봐. 도대체 왜 꼭두새벽부터 저러는지." 내가 아무리 건망증은 봄날 졸음에 겨운 닭 수준이고, 공격성은 여름 지네 먹인 쌈닭만큼 강하다고 해도, 흙 바닥에 놓아 기르는 진짜 토종 닭들과 말이 통할 리 없다. 하지만 용띠인 남편은 굳이 뱀띠인 나를 닭에 갖다 붙이며 흥겨워 한다. 닭띠인 큰아들은 차마 무서워 못 건드리고. 녀석은 마침 유독성 사춘기이기 때문. 

살다 보니 인생은 어쩌다의 연속이었다.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지고 어쩌다 결혼은 해서, 어쩌다 큰아이를 낳고 어쩌다 기자가 됐다. 어쩌다 둘째를 갖고 어쩌다 직장을 나와, 어쩌다 제주에 와서 어쩌다 개를 키웠다. 어쩌다 아파트를 떠나 어쩌다 마당 있는 집을 구하고, 어쩌다 닭까지 얻어 무려 아침형 인간마저 돼버린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그 일, 누구보다 일찍 눈을 뜨고 태양과 함께 장엄한 하루를 시작하는 그 일을, 이토록 손쉽게 해치우게 될 지 몰랐다. 열 아홉의 나에게 닭이 있었다면, 나의 내신과 학적은 자못 달라졌으리라. 어쩌면 이글이글한 야망에 불타 내친 김에 고등고시에 패스했을지도 모른다. 스물 아홉의 나에게 닭이 있었다면, 시어머니보다 늦게 일어나 부엌에서 지청구를 듣는 일 따윈 없었으리라. 그러다 만으로 서른 하고도 아홉, 마침내 나에겐 닭이 생겼다. 이 나이에 내가 새삼 부지런해진 건 '절대로(!)' 갱년기 호르몬 탓이 아니다. 닭 덕분이다.

이번에도 시작은 우연이었다. 지인이 긴 여행을 떠나면서 맡기고 간 병아리들을 대신 키우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의외의 면모란 게 있는데, 최첨단 IT 업계의 대부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양반이 부화기를 사다 알을 품고, 병아리들을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보며 돌보는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냉정한 승부사에게 숨겨진 다정다감한 면모는, 공룡 같은 눈과 발을 가진 닭에게 깃털로 뒤덮인 엉뚱한 엉덩이가 있는 것만큼이나 이채로웠다. 마찬가지로 최첨단 로봇 분야의 가장자리에서 여학생들을 위해 뭔가를 해보려고 끼적대는 내게도, 닭을 키우는 일은 대단히 이질적인 취미이긴 할 것이었다.

몇 달 사이 닭들은 여덟에서 여섯이 되었다. 병아리 시절 떠난 녀석은, 부화될 무렵 껍질을 이틀 동안이나 스스로 깨지 못해 사람의 손을 탔던 아이였다고 했다. 애써 키운 다른 한 놈은 하필이면 귀하디 귀한 검은색 암탉이었는데, 어이없게도 우리집 개의 공격을 받아 쓰러지고 말았다. 남은 여섯 마리 닭들의 암수 비율은 자못 심하게 역전돼, 다섯 마리가 수컷이고 한 마리만 암컷이다. 보통 수탉 한 마리가 대여섯 마리의 암탉을 거느린다는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기들이라 그런지 불안한 평화는 아직 지속되고 있다. AI가 휩쓸고 지나간 제주 바닥에서 당분간 암탉을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라니, 내게는 이것이 '페미사이드' 이후 세상의 은유처럼도 보인다.

도올이 집필실 마당에서 키우던 암탉 '봉혜'와 그가 놀던 '계림'은 아니어도, 이 안에서 뭔가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가 대장인지, 누가 서포터인지, 누가 누구를 귀애하고, 누가 누구를 쪼아대는지, 여기서 지켜보면 다 보이는 것만 같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 누군가와 관계 맺고 끊으며 살아가는 일이, 조금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흙 바닥을 노니는 닭의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쩌다의 길이라는 것이, 요즘 나의 커다란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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