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휴 전 초등학교 교장·논설위원

그때는 왜 몰랐을까, 왜 좀 더 잘 해주지 못했을까. '따뜻한 말 한 마디' 못해준 채 자식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제자들에게도 칭찬 한 마디 제대로 못해준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문득 킴벌리 커버거의 시가 떠오른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은 어릴 적에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의사인 아버지는 두 살 아래 누이동생과 바뀌어 태어났어야 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댔다. 의사나 목사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딴판으로, 곤충채집과 동물관찰에만 몰두하는 아들을 보고 화가 난 아버지는 아들이 모아온 온갖 수집품을 내다버리거나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윈이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떨쳐버리지 않은 것은, 얼굴에 주근깨가 많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이웃집 소녀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단다. 다윈의 수집을 도와주기도 하고, 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듣고 울고 있으면 치마로 눈물을 닦아주면서 그를 위로해주던 유일한 사람. 그 작은 알아줌이 진화론의 싹을 틔웠다고 다윈은 회고했다. 

윈스턴 처칠도 꽤나 공부를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수학을 못해서 아버지로부터도 '바보 같은 녀석'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가까스로 졸업을 하면서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갔더니 "너는 앞으로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다"는 말을 해주었단다. 역사와 문학에는 재능이 있어 시와 셰익스피어를 곧잘 암송했던 처칠은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그래, 꼭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게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어 준 것. 세 번씩이나 도전해서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됐으니, 그가 이끌어낸 2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이튼스쿨 교장실에서 씨앗이 심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2001년 1월호 월간조선에는 '내 인생을 바꾼 교사의 말 한마디'라는 주제로, 국내 저명인사 38명의 대답을 수합한 보고서가 실렸다. 칭찬 한마디로 자신의 진로를 찾은 분과, 관심과 배려로 자신의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질 수 있었던 분도 있었고, 교사의 꾸지람을 듣고 오히려 분발한 경우도 있었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는 학생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맺음말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며칠 전 이보다 더 '위력 있는 말'을 전해 듣고 놀랐다. 내년 2월에 열릴 평창동계올림픽에 한국전력공사가 800억 원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공기업 후원을 부탁드린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한전이 화답한 거란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를 잘 몰랐던 소시민으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재판을 받고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냈다는 돈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라는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런가?"하고 겨우 알아듣는 나는 얼마나 둔한 머리를 가진 바보인가. 

나라가 어지럽게 돌아간다. 공공일자리, 최저임금, 비정규직 제로, 탈 원전 정책 등 중요한 국정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속전속결, 군사작전처럼 결정되는 게 참으로 놀랍다. 충분히 토론하면서 반대의견도 수렴하는 것이 시행착오를 막는 길일 터. 한번 시작해놓으면 되돌릴 수 없는 공무원 증원과 임금 인상, 복지 확대, 탈 원전 같은 정책들은 특히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김정은의 핵과 미사일이 우리를 위협하는 지금,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대통령께서는 '대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국가 안보의 청사진을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다. 공감을 주는 분명한 말씀으로 온 국민의 마음과 힘을 한데 모으는 지도자가 돼주시길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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