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주 제주에코푸드 대표·논설위원

지구촌에 120만 제주인이 살고 있다. 그중에 약 15만명이 현해탄을 건너간 제주 출신 동포들이 차지한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곳은 오사카 이꾸노 지역으로, 2016년 한인수가 23,499명(구역 총인구의 18%)에 이른다. 이중에  70~80%가 제주도 출신이거나 그의 후세들이다. 지금 제주 구좌읍 인구와 맞먹는 규모의 제주마을이 형성됐다. 말하자면 '빅제주도'를 큰집 '안꺼리'라고 한다면 일본 이꾸노는 '리틀제주'의 작은집 '밖꺼리'인 셈이다.  

이렇듯 바깥에 또 하나의 다른 제주사회가 형성된 내력은 9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2년 10월 제주도와 오사카를 직행으로 오가는 정기노선인 홀란드제 군대환('기미가요마루')의 취항과 함께 시작됐다. 이 연락선은 산지항을 기점으로 조천·김녕·성산포·표선·서귀포·고산·한림·애월 등 제주의 주요 포구를 한 바퀴를 돌아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목적지 오사카에 다다랐다. 거기서 첫 밤을 지낸 지역이 이꾸노였다.  

이꾸노는 제주인들이 정착하기 전까지는 버려진 땅이다. 저지대에 위치하여 비만 오면 하천이 범람하여 늘 질퍽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복개된 산지천과 닮았다. 더욱이 이 지역을 가로 질러 남북으로 꾸불꾸불하게 흐르는 '평야천'은 배수로여서 주변은 늘 악취로 가득했다. 그래서 습하고 더러운 곳을 좋아하는 돼지들이나 사육하는 곳으로 알려져 1973년까지만 해도 공식명칭이 '이카이노'(돼지 사육장)였다. 

그러나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만든 것은 부지런한 기질의 제주인이다. 1923년 문제의 하천을 직선으로 바꾸는 준설공사를 당시 동원된 제주인들이 거뜬히 해치운 것이다. 평야천을 따라 토목공사장에는 가건물 합숙소 '함바'와 노동자를 위한 '함바집'(한밭식당)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제주인들이 아름아름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것이 이꾸노 제주사회로의 효시이다.

그러면 이꾸노가 제주인사회로 정착하게 된 동인은 무엇일까. 첫째로 가장 원초적인 본능으로 어려서부터 제주에서 먹었던 음식이요, 둘째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일 것이다. 그들은 일본땅에서 문전상을 차리는가 하면 동향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왁자지껄 떠드는 제주 스타일 제사를 지내고 추석과 설명절을 꼭 지켰다. 그런 1세를 보면서 자란 후세들은 제주인임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이꾸노 재래시장에 가면 제주음식 가게들이 건재하다. 생선 중의 생선으로 쳐서 제사에 반드시 차리는 옥돔은 건조용 대발 위에 나란히 놓여 제삿집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떡집에선 제편으로 쓰일 시루떡을 찌느라 증기로 가득하다. 떡집 판매대에는 부조용 빙떡과 상애떡에 별나라 기름떡도 있고 메밀묵과 계란전도 보인다. 고기집은 적으로 쓰일 돔배고기로 가득하고 심지어 피순대 '돗수애'도 진열되어 있다. 한쪽에선 여든을 넘긴 제주할망이 제수용 나물인 제주산 마른 고사리와 양하 그리고 미역으로 길가에서 좌판까지 벌였다. 예전 서문통시장과 다름없는 모습들이다.

그래 인류학자의 말이 딱 맞다. 제사음식을 마련하고 함께 나누는 공식(共食)의 문화가 민족의 동질성을 만드는 원천이다. 이꾸노를 제주도의 '밖꺼리'로 만든 힘은 제사음식을 파는 재일제주인 재래시장에서 나왔다. 그런데 지금 코리아타운으로 변한 이 시장에는 아쉬움이 가득하게 남는다. 물론 한류 붐을 타고 성업 중이나, 제주 제사음식의 자리에 육지식으로 채워지고 있다. 제사음식이 사라지면 재일제주인의 정체성도 정녕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여 도정에서 제주 제사음식의 생태계를 보호할 조치가 필요하다. 먼저 이꾸노 지역에 대를 이어가며 음식업을 운영하는 장인들에게 제주특별자치도의 음식명인으로 인증해 주어야한다. 궁극적으로는 제주무형문화제로 지정 가능성도 찾아야 할 것이다. 특별자치도의 위상은 얼마나 글로벌 네트워크가 강한가에 달려 있기에 재일제주인은 제주의 보물이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