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논설위원

필자는 지금 미국에 와 있다. 마감 때마다 출장을 나와 시차에 시달리며 쩔쩔매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일과 휴식, 출장과 여행 중간에 있다. 집이 있는 제주와 일거리가 있는 서울을 하루가 멀다고 오가고 있기도 하다. 과학과 문학, 또는 과학과 언론, 과학과 파티, 아니면 과학과 정치 사이에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일은 줄타기에 가깝다. 하는 나는 재미있지만, 보는 이들은 위태로움을 느낀다. 또는 하는 나는 불안하지만, 보는 이들은 흥미진진하게 여기기도 한다. 나는 교차로에 서 있는 경계인이다.

여기 온 것은 IVLP(International Visitor Leadership Program)라는 미 국무부 프로그램 덕분이다. 김영삼, 김대중 두 분 전 대통령도 체험했던 유서 깊은 문화교류 제도라고 한다. 올해는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영감을 받아 <히든 노 모어(Hidden No More)>라고 하는 STEM 분야 여성 리더십 프로그램이 신설됐다. 전세계에서 모인 50명의 여자들이 지역적, 역사적, 사회문화적 환경의 특수성과 각자 전공분야에서의 성취를 소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경험한 공통적인 제약과 아픔들을 함께 나누고 있다. 대부분은 과학기술을 전공한 학자들이고, STEM 분야 교육자들도 있으며, 정부, 스타트업, NGO 섹터에서도 몇이 왔다. 여성학/인류학 전공자도 섞여 있다. 

아무리 선진국이라도 여성으로서 학문적 수월성을 최상으로 발휘해 아카데미아의 일원이 되는 일은 쉽지 않으며, 더구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란 걸 절감하고 있다. NASA 여성 연구원들과 가진 환담에서도 그들 중 몇 사람의 타이틀 앞에는 박사를 뜻하는 DR. 대신 MS.가 붙어 있었다. 한 여성이 굵은 매직으로 닥터라고 고쳐 써 놓은 걸 보고 함께 통쾌해 하며 웃었다. 우리의 성취는 지워지기 쉽다. 특별강연을 맡았던 다른 여성 박사는 친정 엄마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실은 나도 울었다. 여기서 나는 너무 자주 울고 있다.

"여자도 다 가질 수 있다"는 슬로건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모두 그녀를 돕고, 본인 역시 죽도록 노력할 때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아이를 낳고 일하다 과로사 하는 여성들, 악조건 속에서 끝내 버티다가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결국 경력을 중단하게 되는 엄마들, 그렇지 않은 워킹맘들의 아이가 왕따나 학교폭력에 시달리거나 상급학교 진학에 걸맞는 스펙 따위를 장착하지 못하고 낙오하는 현실, 내 몸의 어느 부위가 누구네 컴퓨터를 떠돌지 불안에 떨며 화장실마다 수십 개씩 붙여놓은 몰카 방지 스티커 따위를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어디 아주 먼 나라, 아주 한심한 곳에서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야, 우리 한국 사실은 세계 5위 경제대국이고, 인터넷과 모바일 분야 최고 선진국이거든. 패션도 뷰티도 문화도 음식도 한 가닥씩 한단다. 나를 봐, 엄청 꾸미고 잘 차려 입었잖아. 너네 케이팝 알지? 아, 공유? 맞아, 맞아. 공유가 큰일하는구나. 음식은 김치나 비빔밥만을 말하는 게 아냐, 파인 다이닝을 말하는 거야. 스시나 프렌치나 이탤리언은 어지간한 현지 레스토랑보다 낫다고. 디저트 한 번 볼래, 장난 아니야. 우리 정말 후진국 아니야. 

전세계가 걱정하는 북한의 위협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힘을 내서 일상을 살아가고, 그 중에도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눈부시게 빛난다. 프로그램 담당자들 중 하나는 워싱턴 발레단 이은원 발레리나의 엄청난 팬이었다. 그동안 모은 신문 스크랩들을 다 내게 주었다.

여기 와 있는 동안, 긴 추석 연휴가 지나갔다. 우리 나이로 일곱 살 먹은 둘째놈은 울면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아이 하나를 위해 시어머니와 남편과 도우미 이모님까지 총동원됐다. 그런데도 녀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시차가 반대이니 아주 늦은 밤이나 새벽에 그런 전화를 받으면 그날 하루를 망친다. 나는 우울해진다. 21세기 최첨단 과학문명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이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엄마의 역할이고 책임인가. 우리는 여전히 동물이구나, DNA의 노예로구나. 어느 시대, 어떤 세상이 돼야 여자들이 행복하게 아이를 키우며 일도 할 수 있을까. 아니,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제도에 얽매이지 않으며 온전히 본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70년대 래디컬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선언처럼, 인공자궁이 재생산을 대리해야 우리는 겨우 이류시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니야, 파트너가 있잖아. 파트너랑 같이 만든 일이잖아. 사회가 있잖아, 국가가 있잖아, 시스템이 있잖아.
 
이 같은 고민을 나누는 동안, 한 주가 눈 깜짝할 새 지나버렸다. 남은 두 주 동안, 더 넓고 더 많은 차들이 지나다니는 이 교차로에서, 다음 단계를 고민해보려고 한다. 여건이 허락되는 친구들을 인터뷰하고, 곳곳에 흩어진 친구들의 현장을 찾아가 봐도 좋겠다. 여성과 여성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 글로벌하고도 유니버설한 문제를, 어떻게 로컬에서 풀어나갈지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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