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려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운다’

 오늘도 18명의 새들을 나의 새장에서 날려보냈다. 해마다 2월이면 반복되는 일이지만 아직도 이별이 익숙치않고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졸업장 한장한장을 손에 쥐어주며 눈물이 비칠까봐 무던히도 애를 썼다.

 3년 전 이맘때도 그랬다. 다 큰 아이들과 손잡고 함께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해는 유난히도 가정사정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았다. 그 반을 맡는 3월초 작년에 맡았던 선배 선생님께서 걱정반 위로반의 말씀을 해주셨다.

 "올해 고생이 많겠어. 100일이나 넘게 결석하는 녀석도 있고, 장애아도 2명이나 있어서 힘들겠지만 그 아이들 가르치 는게 보람 아니겠어?"

 첫아이 낳고 1년 6개월 동안 쉬다 복직한 직후라 학교생활에 다소 노력이 필요한데 학급 아이들마저 힘들 거라고 하니 만나는 기쁨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첫날부터 오지 않은 ○○은 이젠 학급아이들조차 신경 쓰지 않는 묻혀진 아이였다.

 "○○요? 걔 원래 안나와요? 가끔 자기 나오고 싶은 날만 나와요"

 "소풍이나 체험학습, 운동회 때만 나와요"

 "교실에선 아이들 때리기만 해요"

 학교에 와도 말썽만 피워 아이들은 이미 ○○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학년초라 정신 없이 바빠서 가정방문을 며칠 뒤로 미루고 마음 무겁게 지내던 일주일째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를 데려가라는 전화였다. ○○이었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달려갔더니 사무실 한쪽에 초라하게 앉아있는 아이가 보였다. 며칠동안 씻지도 않았는지 때가 새까맣고 찢어진 슬리퍼에 남루한 옷차림이 보는 나로 하여금 정말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보다 엄마가 필요한 아이였다. 부모가 있어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그 집에 데리고 가서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고 가장 갖고 싶다는 장난감을 사주었다. 내일 학교 나온다는 약속을 하고….

 뒷날 학교에 나온 그 애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학교에 나오는 것만 해도 박수를 쳐주었던 반 아이들도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학교공부보다 더 시급한 건 학교에 정을 붙이는 일이었다. 학급의 사소한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그러다 보니 반 아이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특히 다른 선생님들께 회람돌리는 일을 참 좋아했다. 왜냐하면 많은 선생님들이 해주시는 칭찬의 소리가(너 학교에 왔구나. 참 착하다. 제법인데…등등) 그 애의 학교 오는 즐거움을 더하는 듯 했다.

 몇 달 후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던 어느 날 씩씩거리며 교실로 들어오는 분이 계셨다. 단번에 두어번 만났던 ○○의 엄마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놈이 어찌나 졸라대던지 안 오면 죽는다 그래서 왔우다. 일도 바빠 죽겠는디…"

 뒤돌아보니 배시시 웃는 그 애 미소에 나도 활짝 웃음으로 답 주었다. 아주 행복했던 수업이었다.

 1년을 마치고 ○○이의 총 결석일수는 9일. 한층 더 성숙해진 ○○이의 어깨를 감싸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야.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렴. 그러다 지치면 다시 돌아와서 쉬렴. 네가 쉴 곳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단다."<김빛나·평대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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