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익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논설위원

서귀포시 송산동사무소가 추진하는 '송산동문화홍보지'를 위해 서귀포 원도심을 답사했다. 1980년대 초 천지연 폭포에서 출발해 서귀포항을 거쳐 동명백화점까지 걸었던 기억이 있어 원도심은 생소한 공간이 아니었으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원도심 곳곳에 담긴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곳을 매력적인 장소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서귀포 원도심 재생사업은 제주시와 서귀포 간 지역격차 해소 차원에서 제주도청이 적극 추진해야 할 과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두 지역 간 발전격차는 최근 제주도청이 발표한 총인구수 49만명 대 18만명(2017년 9월말), 지역내 총생산(GRDP) 10조7000억원 대 4조7000억원(2015년 추계결과)이라는 통계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제주시 원도심(제주읍성 내)은 역대 도정에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며 재생사업을 추진했다. 원(元) 도정에서는 도시재생센터를 설치해 원도심(原都心) 재생사업을 주도하여 오다가 2017년 9월 이 사업이 현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반면, 서귀포 원도심 재생사업은 제주시의 그것에 비해 아직 걸음마 상태에 불과하다. 서귀포 원도심은 제주시 원도심에 비해 형성 역사가 짧고, 공간면적이 작으며, 상주인구가 적어 소규모 재생사업들이 시차를 두고 '솔동산 문화의 거리', 서귀진성과 자구내 해안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서귀포 원도심은 현재의 일주도로(신작로) 남쪽인 솔동산 지역(서귀포 수협입구부터 서귀포항까지)에 해당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서귀면사무소와 도지청(島支廳)이 입지하면서 서귀포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귀포항 일대에는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항구주변에는 일본인 가옥들과 그들이 운영하던 여관, 잡화점, 식당들이 들어섰다.
해방 이후에도 이곳에는 수필가 강은영의 기억(2015)에 저장 된 "책가방을 가슴에 안고 촐랑거리며 뛰어다니던 천안여관 좁은 골목길, 선생님들이나 공무원들이 밥을 먹었던 낙원식당, 젊은이들의 만남장소로 붐볐던 대호다방, 국회의원을 지냈던 현오봉 의원의 처가, 남영호(1970) 선주의 집, 강남여관, 남해여관, 천지여관, 정방여관 등이 즐비했다." 1970년대부터는 서귀포를 찾는 관광객들이 증가하면서 호텔과 여관, 주점과 요정, 음식점, 다방, 세탁소, 사진관 등이 들어서면서 원도심은 '서울의 명동'으로 불렸을 정도로 서귀포를 대표하던 번화가였다.

그러다 1980~90년대에 서귀포시도시계획에 따라 원도심에 있던 남제주군청, 서귀포경찰서, 우체국 등 관공서가 일주도로 북쪽으로 이전하면서 상주인구와 기능시설들이 감소하여 도심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00년대에 들어  원도심 공동화를 막기 위해 서귀포시청과 송산동사무소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협력해 원도심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청에서도'서귀포 칠십리 음식특화 거리'(2008)와 '솔동산 문화의 거리'(2012) 조성사업을 통해 원도심 활성화를 지원했다.

이참에 서귀포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원도심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원도심 홍보센터'를 설치하고, 일제강점기 원도심에 위치했던 주요 관공서와 식당 및 여관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 세우기를 제안한다. 또한 '작가의 산책길 해설사'에게 '서귀포 원도심 해설사'역할을 부여해 원도심도 안내하도록 했으면 한다.   

서귀포 원도심은 한때 서귀포를 대표하던 공간이었다. 이제 이곳은 서귀포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거듭나기 위해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원도심 재생사업이 효과를 거두어 '솔동산 문화의 거리'와 '서귀포 칠십리 음식특화거리'에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었으면 한다. 서귀포 원도심을 살리는 것은 곧 서귀포를 살리는 길이다. 서귀포원도심이 서귀포의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할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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