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식 제주어보전육성위원·논설위원

인문학이라고 제목을 달았으니 만용인가. 사실 외람되긴 하다. 인문학도 학자 전용 용어가 아닌, 누구나 유용하게 쓰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제목으로 차용하였다. 사람 사는일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이 인문학이므로 깔끔하게 제주어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꾸며야 함에도 잡동사니를 더러 섞는 횡설수설로 글감을 찾는 길이다.

사람을 한 자로 줄이면 삶이 되는 이치가 기가 막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비록 호적에는 붉은 줄이 그어지지만 자자손손 계보를 위하여 선인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러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은 삼가자. 호랑이는 늙어서 자연사하고 싶지, 결코 사냥꾼의 총에 쓰러져서 호피를 남기려 하지않으니까. 그러나 저러나 죽은 사람의 이름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산 사람들이다.

제주해녀에 대하여 필자의 소견을 인문학적으로 밝히려고 한다. 제주학자도 아닌 평범한 시인이 나대는 꼴이라서 스스로 쑥스럽긴 하다.

1945년에 해방이 되었으니 1947년에 태어난 나는 일제강점기를 거의 모른다. 탑동 해안마을이 고향이라서 동네여자들이 모두 물질을 하기에 해녀임을 알았다. 여기서 나는 좀녀라는 말 대신에 해녀라는 말을 썼다. 슬그머니 썼거나 일부러 쓴 것이 아니다. 이제 칠십이 넘었지만 유년 시절부터 해녀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으니 좀녀라는 말도 아끼지만 어떻게 써도 자연스러울 뿐이다.

학자에 따라서 해녀라는 말이 일본의 잔재라고 보는데 해녀는 한자 표현에 가깝다. 등대를 일어 음독인 '도우다이'인데 '도대불'이라고 하는 서툰 제주어와 다르게 일본의 해녀를 '아마'라고 부른다. 일어를 공부하다 보면 '오'의 발음에서 수컷의 뉘앙스가. '마'의 발음에서 암컷의 향기가 나는데, '아마'라는 말에선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벌거벗은 암컷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아울러 海女는 일어 음독으로 '가이죠'라고 발음하므로 우리가 발음하는 '해녀'라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해녀항일운동도 있었던 것이고, 해녀박물관도 있고, 해녀 문화도 국제적으로 조명을 받고 있음이다.

표준어인 하품과 제주어인 하우염의 다른 점을 알려드렸듯이 해녀문화에 대하여 더 언급하려 한다. '숨비소리'는 원래 숨을 비운다는 뜻으로 '숨비질 소리'다. 질은 빗질, 도둑질 식으로 행위에 대한 행동을 나타내므로 숨비소리는 축약어라고 볼 수 있다.

물에 뜨다는 말을 제주어로는 '물에 트다'라고 하므로 '테왁'은 '물에 뜨는 박'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지금은 부력이 더 좋은 스치로폼을 대신하고 있으므로 제주어만 남은 셈이다.

물속으로 잠수하는 것을 표준어로는 입수가 될 것이고, 영어로는 다이빙이다. 해녀가 물질하느라고 잠수하는 동작을 나타내는 말로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쌍돛대를 올리다'는 말은 구릿빛 맨발로 태양을 걷어찬다는 시적 표현으로 물속으로 들어가는 발 두 개를 쌍돛대로 나타낸 것이고, 제라헌 제주어로는 '항굽싸다'다.

제주어로 무를 놈삐라고 하는데 '항굽싸다'도 그 못지않게 인문학적인 배경이 있다.

물로 뱅뱅 돌아진 섬에 사는 제주도 여자들은 쌀 항아리가 비면 '조냥정신' 근본이 아닌 거다. 그래서 '굽'은 구두 밑창처럼 바닥을 뜻한다. 소나무로 만든 바가지인 솔박으로 쌀 항아리 밑창을 긁는 형상으로 잠수한다는 거다. 항아리 밑에 남아있는 쌀을 거리려면 머리를 처박고 몸을 거꾸로 해야만 했으니.

1070년대를 기점으로 해녀 복장이 고무 옷으로 바뀌었으니 해녀이지 좀녀라고 부를 수는 없다. 무명으로 만든 물적삼과 물소중기를 입고 눈진뱅이(진눈깨비) 내리는 바다에들어가면서 물결이 얼음칼날 같다고 '솔(살갗)이 파시시하다'는 표현을 들을 수도 없고, 추위에 시달린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불턱에서 불을 쬐느라고 허벅지에 삶은 문어 같은 화상 반점도 볼 수 없으니 해녀와 좀녀는 복장부터가 다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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