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논설위원

사각사각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그날이었죠. 선생님이 어제(11월 19일) 떠나셨다고 지인으로부터 부음을 전해들었습니다. 덜컥 소리가 났습니다. 

캄캄하게 얼어붙던 시대, 선생님은 낭인처럼 조선의 근대사상 탐색이란 긴 여정을 떠나셨습니다. 제주시 삼양동을 고향으로 두셨으나 제주4.3과 한국전쟁의 복판에서 이 땅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스물 넷. 겨우 당도한 12월의 그 땅, 청춘의 어둠을 발라야했던 오사카. "이승만을 위해 총 들고 싶지 않고, 그 사람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치고 싶지 않아서" 떠나셨다죠. 생전, 오사카 츠루하시에서 늦도록 이어진 인터뷰에서 스스로 '실패한 혁명가'라고 하셨던 선생님.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은 역사를 선택한 일이라고 미소 지으셨지요. 죽을때까지 할 수 있다는 것, 행복한 일이라 했습니다. 

한국의 근대사를 통과하려면 선생님을 건너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1957년, 선생님은 「재일조선인 도항사」를 시작으로 한일교류사와 재일한국인문제 등 해방이후 한국근대사상사 연구의 항로를 열었습니다. 「근대조선의 사상」 「조선근대사연구」 「조선의 개화사상」 「조선 근대사」 「서양과 조선」 「한일교류사」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등 수십권의 역작과 방대한 양의 논문을 내셨지요. 특히 1954년 일본 이와나미에서 낸 반봉건 반외세 전쟁의 성격을 규명한 동학농민전쟁 논문은 일본 역사학계가 큰 반응을 보였지요. 

"그 시대, 일본에 국사로 나오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따위 밖에 없었고 흥미도 생각도 없었어.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하면 지적수준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 항상 왜 우리 민족이 식민지가 됐는가, 죽 골수에 박혀있었어요." 오사카 상과대학을 나오고 경로를 바꿔 역사학으로 교토대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이유를 말씀하셨죠.

재일동포 사회의 모순을 껴안으면서 전망을 제시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던 선생님은 당대 재일사회를 대변했던 최고의 계간지였던 <삼천리>와 <청구>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기도 하셨습니다. 재일 외국인이 200만 명을 초과하고 있지만 선구적인 외국인 운동의 선구자가 재일 조선인이라고 하셨지요.

선생님은 이십대 서울 유학시절, 제주4.3 광풍을 듣고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1948년 말 경, 재경 학우들이 모여 만든 회지 <백록>2호를 통해 4쪽이나 되는 4.3관련 권두논문을 썼고, 그로인해 제주에서 급파한 경찰들에 쫓기는 몸이 되고 가족이 고초를 겪었죠. 그 회고를 겨우 다시 꺼내신 것은 지난해 양영후선생님(올 5월 작고)과 함께 오신 제주 방문길에서였지요. 4.3학생운동의 시작점이었을 터임에도 신문에 한 줄 나오지 않아 찾을 수 없는 그 역사적인 회지의 행방이 궁금하기만 합니다. 

한국과 재일 사학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학자셨지만 재일의 삶을 옥죄었던 사상투쟁과 그로인한 고뇌의 나날들을 떠올려서였을까요. 선생님은 '사상이란 인간해방'이라고 하셨지요. 시대가 흩어놓은 가족사의 아픔을 전혀 표내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선생님이 바랐던 것은 "남북이 보복과 유혈의 마침표를 찍게 되는 그날"을 원하셨던 것, 맞지요.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고향 바다를 서성이면서 그토록 고향에 깃들기를 원하셨으나 잠시의 고향이었죠. 늘 스스로 '싱거운 사람'이라며 소탈하고 겸허했던 역사학자. 역사를 보는 눈은 냉엄했으나 낭만으로 후학들을 다독이셨습니다. 평소의 성품대로 마지막 길도 미리 정리해놓으셨다죠. 가족과 지인 몇 분만 모시고 떠난 은은한 작별식 역시 격조가 있어 울림이 컸다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저서와 평소 읽던 책들을 내놓아 누구든 갖고 가시라고 하셨다지요. 향년 91세. 파란만장 격한 파도를 타넘으면서 끝내는 한번 갈 길 가셨지만, 재일사회의 정신적 지주이자 조용한 거목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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