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은 제주대 행정학과 교수·논설위원

"얘야, '1987(감독 장준환)'이라는 영화를 봐야겠다. 같이 가지 않으련?" 누적관객수 400만을 돌파했다는 영화의 신문기사를 보다가 문득 칠순의 노모(老母·늙은 어머니)가 비장하게 말했다. 나 또한 보고는 싶었으나 새해 벽두부터 보기엔 너무 무겁고 가슴 아픈 주제라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나는 노모를 따라 영화 관람에 나서게 됐다.

주말이라 그런지 영화관은 빈자리 하나 없이 빼곡했다. 그 시절 대학을 다녔을 내 또래의 중년들부터 우리 부모님 세대 연배의 관객들, 그리고 대학생 정도의 커플들과 그보다 어린 중고생 관객까지 참으로 다양한 연령대로 영화관이 가득 차 있었다.

1987년 나름 인생의 암흑기(暗黑期·도덕이나 이성, 문명이 쇠퇴하고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인 수험기간을 지내고 있던 나에게도 그 시절은 무관심할래야 무관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서울대학교 학생의 신문기사가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었고 구두를 사러 나갔던 명동에서 맞닥뜨린 넥타이 부대의 시위장면은 철없던 고딩에게도 사뭇 충격적인 인생사건이었던 것이다. 

초여름에 접어든 어느 날 저녁 무렵 오빠가 어머니 앞에 앉았다.

"어머니, 한열이 시신을 지키느라 과마다 돌아가면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불침번을 섭니다. 오늘은 집에 못 들어와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주무세요."

평소 전형적인 단무지(단순 무식 지X) 범생이라고 생각했던 공돌이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오자 어머니는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너무나도 결연한 아들의 눈빛에 어머니는 포기하고 대신 꼭 몸조심해야 한다는 말로 배웅했다. 

그날 밤새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거실에 앉아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 날 돌아온 오빠는 어머니의 눈물로 며칠간 외출금지를 당했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공교롭게도 나도 그 대학을 가게 됐고 피 흘리던 이한열의 사진에 등장하던 교문을 매일 지나 학교에 가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교문 앞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전국 집회가 열렸고 지하철역에서 정문까지 이어지는 600m 남짓의 인도에는 양쪽으로 전경들이 늘어서서 학생증 검사를 해댔다. 그들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가방을 뒤지기 일쑤였고 어떤 날은 등굣길에 다짜고짜 닭장차라고 불리던 전경버스에 실려가 어딘지도 모를 한적한 외곽에 버려지는 날도 있었다. 

시위에 나갔던 동기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수업에 들어오는 날도 있었고 최루탄을 쏘는 차가 학내까지 진입해 오기도 하고 시위대를 쫓아 도서관안까지 백골단이라 불리던 사복체포조가 들어오기도 했다. 

마스크와 치약, 손수건은 매일 아침 챙겨야 할 등교필수품이었다. 지금은 서점에서 일상적으로 팔리는 사회과학서적들이 그 시절에는 금서(禁書·출판이나 판매 또는 독서를 법적으로 금지한 책)였기에 숨어서 몰래 봐야만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으로써 기말고사를 거부하기로 결정한 날 교수가 덤덤히 말했다. "그래, 학생들이 너무 시대에 둔감해도 안되는 거지".

영화를 보는 내내 어머니는 조용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 영화가 어땠느냐는 나의 질문에 어머니는 "내 아이들만 무사히 큰 것이 너무나 미안스럽고 저 세월을 별탈없이 지내 준 너희들에게 고맙기만 하구나"고 대답했다. 

우리 세대가 지나온 진실임에도 그것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3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가보다. 내 어머니에게도 영화 관람은 그런 마음에서 치러야 할 하나의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자로서 우리는 올 한해도 마음의 빚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만 하겠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