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지난 2000년 일선 고고학자 25명이 모여 발굴 현장의 경험을 써낸 책의 제목이다. 이 말은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은 역사적 해석이 가미될 때 그 가치를 띤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개발-훼손-조사의 악순환
 지난 1984년 용담동 유적을 시작으로 제주도에서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된 이래 수많은 고고학적 성과를 얻었다. 제주도청 문화재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모두 45번의 발굴조사가 실시돼 약 71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 과정에서 고산리 유적이 한반도 최고(最古) 신석기 유적으로 밝혀지는 등 수많은 고고학적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제주도내 고고학 발굴은 대부분 선 개발·후 발굴의 수순을 띠고 있다. 각종 개발에 따른 문화재 훼손, 그리고 긴급 구제발굴, 개발계획 변경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최근의 발굴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2000년 전 우물 군집이 발견된 외도동 유적이나 신천 마장리 유적도 도로공사 중 유물이 발견돼 뒤늦게 조사가 실시됐다.

 이런 현상은 도내에서 각종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앞으로 늘어날 개발 수요에 미뤄본다면 본격적 학술발굴조사의 실시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각종 문헌과 기존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유물 산포지역에 대한 학술발굴조사를 실시, 이를 개발계획에 반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발에 따른 훼손, 긴급 구제발굴, 그리고 개발계획 변경이라는 이중 삼중의 예산과 인력 낭비를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고고학 인력 양성 외면하는 대학
 최근 국립제주박물관은 종달리 일대 학술발굴을 실시, 2000년 전 습지 유적을 밝혀내는 등 소기의 성과를 얻어냈다. 하지만 이런 학술발굴은 드문 일로 꼽힌다.

 학술발굴을 실시하고 출토된 유물에 대한 성격을 규명해야 하는 기능은 대학에서 담당해야 하지만 대학에서는 고고학 관련 강의조차 개설되지 않고 있다.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고고학적 명제는 발굴이 고고학 연구의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도내 고고학 전문가들은 현재 제주도의 고고학적 연구분야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직 연구되지 않은 분야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제주대학 사학과에는 고고학을 전공한 교수진이 없다. 대학이 고고학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면서 발굴 현장에서는 항상 인력부족을 겪는다.

 현재 도내 발굴조사를 주로 담당하는 기관은 제주문화재 연구소, 제주문화재 연구소에는 1명의 실장과 연구원 4명이 발굴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문화재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제주대학에서 고고학 강의가 개설되지 않으면서 고고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이 없다”고 호소한다. 이 때문에 학부과정을 포함 최소 15년 이상을 발굴현장에 있어야 겨우 막내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마저 나오고 있다.

△연구 지원대책 필요
 고고학 분야를 비롯한 민속학, 인류학 분야는 제주의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학문이다. 하지만 대학에서조차 이들 학문에 대한 투자는 인색하다. 관련학과는 물론 강의조차 개설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정은 도내 주요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관련 전문가를 학예직이 아닌, 별정직으로 발령하면서 연구의욕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인문학 분야는 장기적 과제의 정책적 지원을 통한 연구가 필요한 분야인데도 학술 연구비가 책정된 박물관은 전무한 실정이다. 지엽적인 미봉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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