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오늘 우리 사회는 문재인 정부의 토털 캐치 프레이즈인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적폐청산(積幣淸算)'으로 부산스럽다. 관계당국에서는 이제 묻어진 적폐를 찾아내어 그 자리에 비리와 부조리가 다시는 도사릴 수 없도록, 둥지 자체를 뜯어고치거나 아예 새 둥지를 마련하는 일들을 하는 모양이다.

요즘엔 '아! 나라가 썩어도 정말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이야.' 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심지어는 '이런 나라 국민으로 산다는 게 차라리 부끄럽다'는 자괴감에마저 빠져들곤 한다. 어떻게 틈이 바늘구멍만큼만 보이면 거기엔 영락없이 부정과 비리가 스며든단 말인가. 이러고도 그 어느 어느 나라에 빗대기 좋아하는 높은 민족적 자긍심은 여전히 유효한가. 온 나라가 다 썩어도 최소한 대통령 한 사람만은 올곧게 남아주기를 바랐는데. 이는 나 같은 필부의 소아적 소망에 불과한가. 왜 우리는 존경스런 대통령을 갖지 못하는가. 이 나라의 현대사가 왜 이토록 얼룩져야만 하는가. 정말 부끄럽고 가슴 아프지 아니한가.

역대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화려하게 펼치던 그 캐치 프레이즈들은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날 회자되는 '적폐청산'도 사실은 식상하리만큼 낡은 한낱 올드 버전(old version)이다. 그걸 완장으로 차고 머리띠로 매며 플레카드로 들고 다니며 깃발을 휘둘러대던 그때 그 애국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지금쯤은 나서서 변명이든 항변이든 뭔가 있어야할 게 아닌가. 도대체 저들의 눈에는 국민들이 봉(鳳)으로 보였단 말인가.

그러나 오늘 필자의 붓끝은 '여기까지'가 아니라, '여기부터'를 향한다. 지난 얘기는 정말이지 국민적 자존심이 상해서 되도록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 지도자에게는 '국민을 하늘 같이 섬김' 이 가히 천명(天命)이거늘, 국민을 되레 안하무인(眼下無人)의 노리개로 삼아온 저들과 무슨 얘길 더 하랴.

대체로 개혁을 외치는 이들의 심리 저변에는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기본인식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은 개혁을 이끌어내야 할 주역, 이른바 개혁의 주체이고, 나머지는 모두 개혁되어야 할 대상, 곧 개혁의 객체라는 인식이다. 문제는 이 그릇된 전제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출발점 행동부터가 잘못 되었으니 그 결과야 불문가지(不問可知)가 아니겠는가.

사실 개혁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딱히 주체와 객체로 양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이들 대부분은 바로 어제의 주체들이 아니던가. 당장이라도 돌아서면 국면은 이처럼 전환될 수도 있다. 새 정부가 바로 이 사실을 잊으면 나라는 다시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된다. 모름지기 개혁은 국민 모두가 '거듭나기(reborn)' 위한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으로 승화되어야 할 명제이지, 단순히 주체와 객체간의 핑퐁게임이어선 안 되는 것이다. 오늘의 적폐는 우리가 모르는 데서가 아닌, 바로 우리 주위에서 그리고 우리 눈앞에서 그간 야금야금 쌓여온 것들이다. 오늘 개혁의 매스를 손에 쥔 이들이여, 그대 그땐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가. 설마 그땐 내 소관의 일이 아니었다며 빠져나갈 텐가. 아니면 그땐 우리의 눈이 어두웠고, 알았어도 의지와 용기가 없었고, 쓰도 달도 않은 일이라 외면했었노라고 솔직하게 고백할 텐가.

지도자는 정직하고 겸손하며 자기주변이 유리알처럼 투명해야 한다. 업무의전문성이나 리더십 등은 마땅히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물재승덕(勿才勝德)이라 했듯이, 그러한 요소들이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도덕적·인격적 덕목 보다 앞세울 순 없다. 끝으로, 나라다운 나라 건설을 추구해 나가는 길에 추호라도 미묘한 정치적 함수관계나 편당심(偏黨心), 그리고 사심(私心)의 개입은 예의(銳意)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국민을 우롱하고 국격을 추락시키는 망국의 춤사위는 여기까지로 족하다. 백성은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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