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필 제주관광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논설위원

설 명절이 성큼 내일로 다가왔다. 모처럼 가족이 한데 모인다.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푸짐한 음식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아이들의 재롱으로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렇게 좋은 날이련만 가족 구성원 모두가 명절이 즐겁고 행복한 날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등골이 휜다. 

차례음식을 포함한 명절음식 준비와 뒷바라지는 성씨(姓氏)다른 여성의 몫이다. 평소에는 비교적 평등한 삶을 사는 부부도 명절을 맞아 2대, 3대가 모이면 권위를 세우고 수직관계로 변한다. 집안 일을 잘 도와주던 남편도 부모와 다른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모른 체하기 일쑤다. 젊은 세대는 물론 나이 든 부부라 할지라도 부부만 생활할 때는 어느 정도 집 안일을 거들지만 명절엔 가부장제가 부여한 성 역할이 노골화되고 모든 가사노동이 여성들에게 전가돼 버린다. 시어머니가 수라간 상궁이라면 며느리는 무수리. 주방의 위계는 더 빡세다.

 지금은 할머니가 된 70대 이상 세대가 며느리 시절, 전통적 가족문화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구분이 뚜렷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남편가문의 대소사는 당연히 자신이 감당할 일이라 여겼고 차별받는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부당하거나 억울하다는 심리적 갈등, 그런 건 없었다. 한마디로 군소리 없이 며느리역할에 임했던 세대다. 

다음 세대인 5060세대의 경우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고 가부장문화의 불합리성과 남녀평등에 대한 화두를 접한 세대이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문화 속에서 교육받으며 자랐다. 마음이 불편하고 속상해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툴툴대면서도 며느리역할을 수행한 세대다. 

그런데 현 시점의 젊은 며느리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성역할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성장해왔다. 부부관계도 수평적이다. 그러나 명절노동의 풍경은 수십 년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삶의 많은 영역이 남녀 평등한 방향으로 변화됐지만 명절노동의 불합리한 남녀역할은 유독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 

 "얼굴 못 본 니네 조상 음식까지 내가 하리/ 나 자랄 때 니 집에서 보태준 거 하나 있니/ 며느린가 일꾼인가 이럴려고 시집왔나" 수년 전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며느리 넋두리'라는 글의 일부이다. 가부장문화가 강요하는 며느리 역할이 부당하다는 항변과 진한 억울함의 토로 속에 이들의 의식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들은 윗세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젊은 세대 며느리들은 넋두리를 넘어 투쟁도 불사한다.  "시어머니와 한바탕했어요. 그래서 명절에 (시댁에) 안 내려갔어요. 덕분에 완벽한 명절을 보냈죠." 당돌하게 말하는 며느리, 아들 부부가 사고 때문에 집에 오지 못했다고 주변에 둘러대는 시어머니. 실재 한 가정의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가 지난달 개봉하면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 같으면 감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속마음을 거침없이 뱉어내는 며느리를 보며 젊은 여성 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나이든 세대는 발칙하다고 쯔쯔 혀를 차댄다. 누가 옳다 그르다 따위의 평은 중요하지 않다.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며느리들의 양성평등 의식은 점차 강해지고 있는데, 남녀유별(有別)한 이 땅의 명절문화는 변함없다는 점이다. 

한비자(韓非子)는 "세상이 달라지면 일이 달라지고, 일이 달라지면 대비하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世異卽事異, 事異卽備變·세이즉사이 사이즉비변)"고 강조했다. 세상은 이미 달라졌고 거듭 진화하고 있다. 농경사회의 대가족체제를 유지했던 가부장문화가 더 이상 이 사회의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내일, 설 명절에는 온 가족이 둘러 앉아 4차 산업혁명시대의 설 명절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화기애애하게 논의해 보시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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