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논설위원

서귀포시 호근동에 삼매봉과 어우러져 있는 대형 분화구 하논은 직경이 약 1㎞에 이르는 마르형 분화구이다. 하논 일대는 지질학 분야뿐만 아니라 구석기시대의 생수궤유적을 비롯하여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는 처소이다.

구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물이 차 있는 연못이었으나, 고려 말에 수로로 물을 뺀 뒤 논으로 만들어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ᄆᆞᆯ망소’로부터 동남쪽 ‘걸메목’까지 배수시설인 물길을 내서 이 물을 천지연폭포로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 남성리의 옛 지명 ‘주어동(走魚洞)’도 이때 연못 속의 물고기들이 빠져나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전설은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매양악(삼매봉)은 정의현 서쪽 30리에 있다. 오름의 가운데가 트이고 넓어서 수전(水田) 수십 경(頃)이 있다. 이름이 대지(大池)”라고 적혀 있다. 조선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 전 왕조 고려 때 사실을 기록한 사서이니 적어도 지금부터 700년 전인 14세기에는 이곳이 논이었음이 확인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이름은 하논(大畓)이 아니라 한못(大池)이었다는 것이다. 분명 큰 연못이었다가 인위적으로 논으로 바뀌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하논은 국가가 소유하던 관답(官畓)이었다. 주민들은 소작 형태로 경작하였고 개인 소유는 많지 않았다. 19세기 이후 점차 사유지가 많아져서 작게는 100평으로부터 수백 평까지 소유한 주민이 4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소유자 대부분은 호근리와 서호리 주민이었고, 일부 하논마을 주민도 있었으며, 직접 경작했다고 한다.

논이 있었기에 하논 분화구 안에는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언제부터 마을을 이루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1901년 ‘이재수란’ 직전 천주교 통계에 120명의 하논마을 천주교인이 있었음을 보건대 200명 가까운 주민이 거주했던 것 같다.

1900년 6월 김원영 신부가 하논마을의 4칸짜리 초가집을 구입해서 제주도 두 번째 성당을 설립했다. 그러나 1년도 채 안되어 교・민간 갈등으로 하논성당에서 하효리 오신락 노인이 죽게 되고 하논은 ‘이재수란’의 발발 진원지가 되었다. 민란을 거치면서 민군에 의해 성당이 파괴되고 많은 신자들이 죽거나 떠나버렸고, 1902년 타케 신부가 본당을 홍로로 옮겨 버림으로써 성당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해방 직후에 하논마을에는 16가구의 주민들이 거주했다. 4・3사건 때인 1948년 11월 무장대의 습격으로 주민 1명이 사망하자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 경찰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소각되어 폐촌이 되어버렸다. 예전 마을은 1960년대 이후 대부분 감귤 과수원으로 변해 버렸다. 이제 하논마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져갔다.

하논마을 옛터에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를 담고 있는 유적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마을 올레길과 울담, 이재수란 희생자의 무덤, 4・3 때 불탔던 봉림사, 일제 때 산림자원을 관리했던 영림소 터 등등. 최근에는 올레길과 순례길이 하논마을과 논을 지나게 되어 많은 외래객들이 찾는 명소로 바뀌었다.

현재 하논 분화구에 대해서는 호수 복원을 추진하는 ‘복원 범국민위원회’와 논 습지 생태계를 보전하자는 ‘보전 범도민위원회’가 그 가치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거기에 지주들의 권익 주장까지 겹쳐져 ‘한못’ 복원과 ‘하논’ 보전, 지주 소유권이 상호 대립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앞으로 삼자를 아우를 수 있는 제3의 대안을 마련할 때라고 본다. 대통령 공약이라고 토목공사 식으로 밀어붙이는 발상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예전 토지 소유 마을이었던 호근・서홍 마을 주민들의 문화정서도 소중하게 보아야 한다. 하논의 미래는 서귀포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전 제주도민의 관심과 애정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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