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 문화부국장 대우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한 중앙지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20대 후반 여성 시인의 시 제목이다. 미용실 스태프·보조 연기자 이력까지 화제를 모으며 원고 청탁에 시집 제의까지 잇따르고 있다는 인터뷰를 읽었다. 사실 술은 ‘센 편’이라고 했다. 슬쩍 엄살을 부렸다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시인이 툭하고 던진 제목에 왜 들썩였을까 하는 것이 궁금할 뿐이다. 만약 비슷한 연배의 남성 시인이 썼다면 ‘혼자 살고’ ‘술이 약하다’는 뉘앙스를 어떻게 읽을지 싶은 정도다. 그래도 하나 정도는 묻고 넘어갈까 한다. 이 말이 과연 ‘예스(Yes)'의 의미인가.

 

성폭력 범죄를 고발하는 ‘미투’(Me Too,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는 뜻)‘바람이 뜨겁다.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이 아프다. 미투 운동은 지난해 배우 얼리사 밀라노가 미국의 거물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행을 SNS을 통해 알린 것을 시작으로 기네스 팰트로, 안젤리나 졸리, 메릴 스트립 등 유명 여배우들이 할리우드에 만연한 권력형 성폭력 경험을 폭로하며 불붙었다. 올해도 베를린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들이 검은 옷을 입는 것으로 연대하며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직인 서지현 검사가 ‘8년 전 경험’을 통해 조직 내 성희롱을 폭로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법조계에서 시작된 불씨는 정치권을 거쳐 사회 각계각층으로 번졌고 현재는 문화계를 흔들고 있다. 불확실한 폭로성 글로 마녀사냥의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왜 미투인가’에 있다. 특권층 내 성범죄는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가부장적 문화와 봉건적 위계질서 안에서 묵인되고 또 희석돼 왔다. 공동체적 순결이란 억압된 사고와 ‘공인된 불이익’이라는 피해를 경험하며 모두가 입을 다물었고 애써 모른 척했다. 피해자를 바라보는 주변의 잘못된 시선들까지 관행이란 이름의 구조적 성폭력을 방관했다. ‘괜찮을 줄 알았다’식의 자기 합리화와 원하는 목표를 위해 반인권적인 폭력을 감내했던 것들은 이 시대를 사는 모두의 굴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아팠다’ 소리내기 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 현실이다. 수직형 권력 구조 안에서 ‘합의에 의한’이나 ‘강압적이지 않았다’식의 비루한 변명이 통할 것이라 믿는 상황도 아찔하다. 침묵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더 이상 모른 척 하지 않겠다는 ‘#위드유(With You)'운동이나 나부터 달라지겠다는 ’#Me First'바람이 조심스럽지만 일고 있다.

 

우리는 보고 겪었다. 올해 70주년이 되는 제주 4·3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 여성이어서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미 공개된 증언들만으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폭도’라는 낙인 아래 자행된 폭력 앞에 다치고 목숨까지 잃었어도 여성은 약자였고 타자였다. 비인도적·반인륜적 범죄의 피해자에게 가해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라는 칼날은 유독 잔인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강제된 침묵으로 상처를 키웠다. 제주4·3연구소의 「이제사 말햄수다」와 456회의 장기연재를 통해 4·3을 양지로 끌어낸 제민일보의 ‘4·은 말한다’는 여전히 일그러진 성관념에 속에서 치유 받지 못했던 이들의 ‘미투’를 이끌었다. 그렇게 제주4·3이 남긴 끔직한 결과물의 일부가 세상에 드러났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혀를 내두를 만한 일들 앞에 침묵은 길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제주 사회는 그 아픔을 인정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연대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 고통을 공감하고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이제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캐치프레이즈와 붉은 동백꽃 아래 ‘미투’라는 외침이 들린다. 나도 당했다가 아니라 나도 알고 있다의 ‘미투’다. 그 소리는 좀 더 커도 괜찮다. 여럿이 함께 내질러도 된다. ‘예스’까지는 아니어도 역사에 대한 인정과 연대의 의사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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