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인문학 詩네마 토크 (4) 시와 영화의 만남

영화 '학생부군신위'.

다양한 목소리로 동일한 지위 갖는 자유간접화법 표현
실제이면서 시나리오이기도 하다는 것 선보이는 작품

모든 생명이 새롭게 움튼다는 3월, 여기저기서 예기치 않은 부음 소식을 듣는다. 생을 등진 이들은 늘 가까이에 있었던 이도 있고, 멀리서만 바라보던 이도 있다. 그 중에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이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 가족의 옆에 온종일 앉아 잔심부름을 하노라니 여기저기 타지에서 몰려든 가족들의 울음과 웃음이 왁자지껄하다. 더러는 망연자실해 있기도 하나 대체로 안부를 묻고 자기들 사는 얘기를 하느라 바쁘다. 사연도 가지가지, 마치 황자우의 시 「여정」을 읽는 듯하다.

목포 고모는 남편이 사우디 나가고 자식들이 선청 불량아들과 어울려 속썩는다. 부산 작은아버지는 어물(魚物) 거간꾼이다. 객지에서 식구도 많고 살기가 팍팍하다. 자꾸 빽이 있어야 한다고, 집안에 판검사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서울서 공부 많이 했으면 뭔가 해야지 않느냐고 한다. 학원 선생인 광주 형님도 과외 금지 바람에 쫄딱 망했다. 서울누님은 보험회사 외판 사원이다. 목표 달성액이 1억 원이라며 생명보험 하나쯤 들라고 한다. 간호원인 형수를 앞세우고 미국 간 작은 형님은 한인가에서 페인트상을 한다. 다들 어렵다고 한다. 먹고 살기가 뻐적지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간 뭔가 붙들려고 바둥거리는, 그러나 더 이상 잡히지 않는 안간힘이다. 그러나 안간힘도 힘이다. 중요한 것은 그래도 당신들은 손에 물 안 묻히고 산다는 점이다. 큰어머니가 다시 훌쩍거리고, 둘째 작은아버지는 등을 돌려앉고, 해남 고모는 역시 말이 없다. 잠시 사람들은 썰물과 밀물이 뒤바뀌는 소리를 듣는다. 드는 물살이 해우 발대 사이로 빈 배를 뜨게 한다. 이 섬을 뜨라고 누가 말한다. 타고 나기를 뱃사람으로 태어난 종손, 경석 형님이 버럭, 꽥 소리를 지른다. 이 오살할 놈의 섬을 떠나려도 빚으로 묶여 있다고, 겨울내 쎄빠지게 해우를 만들어도 여름에는 다시 빚내어 산다고, 목포나 광주 사람들의 빚으로 몽땅 꼬나박는다고. 이튿날, 바람 없고 맑고 찬 아침, 한 채의 꽃상여를 짓고 앞바다 솔섬으로 사람들은 건너갔다. 여인들은 물가에 남아 울었다. 섬의 부족한 흙으로 할아버지를 묻고 사람들은 돌아갔다. 통통배로 직행버스로 고속버스로 택시로 혹은 비행기로 모두들 일이 밀렸다고, 목포로, 광주로, 부산으로, 혹은 서울로, 혹은 엘에이 

- 황지우, 「여정」 부분

황지우의 시 「여정」은 그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 지성사, 1983)에 실린 시편이다. 이 시는 박철수 감독의 영화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1996)의 시나리오가 되었다. 시 전체에 등장하는 인물의 목소리들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출연하며, "4박 5일장" 동안에 벌어지는 주요 사건들이 시의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영화 <학생부군신위>는 극중 아버지(최성 역)가 아이가 태어나는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상한 꿈이라며 독백하던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객사한다. 이로써 각지에 모여 있는 자식들이 집으로 모여든다. 그 이후에 전개되는 스토리는 장례 절차(임종, 수시, 고복→발, 전, 부고→성복제→빈 상여 얼르기→발인)에 따른 매인 스토리 구조를 따르면서 그 사이에 발생하는 온갖 에피소드가 이 영화의 진면모라 할 수 있다. 스토리상 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①할아버지의 죽음→아버지의 죽음 ②전라도 완도군에 부속된 섬→경남 합천군 기회면 ③미국에서 온 자식의 직업은 페인트상→목사 ④화자의 직업이 불분명→영화감독 등으로 바뀌어진 것 이외에 가족 체계와 지위, 직업 등이 약간씩 다를 뿐 전체적으로 그 내용은 유사하다. 한 편의 시가 영화 한편의 시나리오가 되었다. 

이 영화의 특이점은 박철수 감독이 극 중 큰아들로 출연해 화자 역할을 하며 동시에 장례식 전반을 영화로 촬영해 중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극 중 큰아들인 영화감독찬우(박철수 역)는 영화 촬영 중 아버지의 부음소식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장례식 절차는 호상(권성덕 역)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고 큰 아들인 찬우는 내내 침통한 표정으로 가족들과 문상객들의 행동을 지켜본다. 도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영화로 찍는 등 주?객관적 시점을 견지한다. 그의 시선은 마치 카메라의 시선을 닮은 듯 울고, 웃고, 놀고, 싸우는 난장(亂場)을 있는 그대로 지켜본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와 현실, 삶과 죽음, 장례식과 잔치, 슬픔과 기쁨, 일상과 환상 사이, 독경소리와 찬송가, 문어체와 구어체, 통곡과 거짓울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이 곧 죽음이며 현실성이 잠재성인 실재를 보여주고자 한 감독의 전략이다. 

시 「여정」과 영화 <학생부군신위>에서 발견되는 미학적 특성은 자유간접화법이다. 이탈리아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인 파졸리니는 자유간접화법을 "작가가 자신의 등장인물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서 인물의 심리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까지 작가의 입장에서 채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 편의 영화에 주인공은 없고 다양한 목소리를 동일한 지위를 갖게 하는 것이 자유간접화법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시 「여정」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출현한다.'큰어머니', '에미들', '미국 성님', '사내들', '첫째작은아버지', '작은 고모', '광주 큰형님', '서울 선자 누님', '섬사람들', '뭍사람들'… 등 누가 주인공인지 알아차릴 수 없다. 모두가 주인공이며, 삶의 질곡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이다. 이러한 질곡의 삶들을 영화 속에서는 질펀하게 쏟아놓는 넋두리와 울음 바다, 싸움질 등으로 묘사된다. 

묵묵히 고향마을을 지킨 둘째 찬길이(주진모 역), 원수지간 자식과 사귀어 집에서 쫓겨난 찬숙이(추귀정 역), 미국에서 온 찬세(박재황 역), 망자의 이복동생 팔봉이(김일우 역), 배다른 자식 바우(김봉규 역) 등은 장지로 가는 멀고 긴 대열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성기(性器) 공동체'로써 화해에 이르게 된다. 영화 속에서 소외된 인물인 것 같으면서도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은 '바우'와 둘째 며느리에게서 태어난 아기이다. 바우는 영화 속 아버지가 바깥에서 낳은 자식이다. 

영화 내내 그 사실은 밝혀지지 않는다. 바우는 사람들 틈에서 서성거리며 말썽을 내내 부리기만 한다. 급기야는 팔봉의 차를 불태우는 일까지 저지른다. 그것은 돼지몰이를 하는 사람들 틈에서 돼지를 보호하고자하는 몸부림 속에서 총들을 든 팔봉이에 대한 복수극이었다. 어린 아이 눈으로 본 돼지의 살생은 끔찍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산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돼지의 살생이야말로 순수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실제적 현실이기도 하다. 이에 사람들이 먹는 떡과 술을 가져다 돼지에게도 먹이고, 밀려드는 문상객들을 위해 돼지 한 마리를 더 잡아야겠다고 했을 때 한사코 저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어머니의 발언을 통해 바우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리고 발인 행렬에도 바우를 합류시킴으로써 비로소 가족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장례식 내내 배 속에 있던 아기가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태어난다. 아기가 태어나는 모습을 영화 속에서는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시퀀스인 기저귀를 너는 장면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죽음을 통한 삶의 환기이다. 그리고 어쩌면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맨 마지막 씬, "컷.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박철수 감독의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가 실제이기도 하면서 영화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로 삶은 영화 같고, 영화는 삶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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