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총리로 지명된 정운찬 교수가 국회 청문회 절차를 밟을 때의 일이다. 그동안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갔다. 고위공직자 임용을 위해 살아온 전력과 능력을 검증하고 미래의 정책을 묻고 답하는 자리였다.

지나간 일들을 확인하거나 추궁하는 질문이 많이 나왔다. 그 중에 김익렬 장군의 딸들과 관계를 해명하는 문답이 있었다. 장군의 집에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제주4·3사건의 풍랑이 사나왔던 시절, 제주인들 편에서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애썼던 이들 중에서 단연 김익렬이 돋보인다. 

사건이 나던 4월 그는 제9연대장으로, 계급은 중령이었다. 전국의 8도에 하나씩 향토연대를 창설해 경비대를 창설하고 아홉 번째로 제주도에서도 병사들을 모병하고 연대를 만들어갔다. 일본군이 만들어 활용하다 남긴 시설을 활용하기 좋은 모슬포에서 출발했다.

군사영어학교를 수료하고 먼저 임관한 장교들이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이를 이어 조선경비대사관학교에서 단기 과정을 마친 초급 장교들이 중대장 혹은 소대장으로 배치됐다. 

이 과정은 나중에 육군사관학교를 발전했고, 이들은 육사 졸업생으로 인정받았다. 인근 지역에서 지원하는 병사가 적으면, 연고지를 찾아가서 젊은이들을 모아야 했던 시절이다.

김익렬 소령은 1947년 9월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연대장으로 승진한 때가 1948년 2월 1일, 계급도 곧 중령이 됐다. 그리고 바로 제주4·3사건이 일어났다.

김익렬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민과 대립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고 판단했다. 

선무 작전으로 피해를 줄이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4월 말 무장대 지도자 이승진(김달삼)과 평화 협상을 추진했다. 4·3으로 사라진 마을 중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살았던 무등이왓이 만났던 장소로 보인다. 옛 구억초등학교 자리로 생각하는 글들이 많기는 하다. 

꽤 긴 시간 산간을 달려가서 만난 점이나, 모슬포 일대가 시야에 들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등이왓 어느 집이었다고 추정된다.

긴 시간 회합 끝에 합의한 사항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5월 1일 오라리에서 무장대가 민가를 습격한 것처럼 조작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메이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꽤 공들여 촬영한 영상자료가 있다. 이는 오히려 그날 일어난 일이 연출된 것이라는 의혹을 강하게 남긴다.

미군정은 강경 진압 방침으로 선회했고 5월 5일 제주도에서 열린 수뇌부 회의에서 김익렬은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했다. 

결국 5월 6일 제9연대장에서 해임돼 여수 지역의 제14연대로 전출됐다.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이 부임해 제9연대는 강경 토벌 작전을 추진했다. 무차별 살상으로 민간의 피해가 커지면서 그 부하들이 1948년 6월 18일 연대장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혹여 그 배후에 김익렬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일어나서 미군 방첩대(CIC)가 서울로 불러서 조사하게 됐다. 그리고 1948년 8월 충청남도 온양의 제13연대로 발령했다. 

그 해 말에 제14연대는 제주로 출동하여 사태를 진압하라고 명령받았지만 거역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주일 남짓 사이에 수천의 인명이 살상됐고 패주한 항명 세력은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유격전을 벌이게 됐다. 이 사건이 여순반란으로 불리어왔던 참극이다.

제14연대의 항명의 배경에는 김익렬이 연대장으로 복무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박진경 살해로 인한 조사가 없었다면 큰 풍랑에 휩쓸려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풍운아 김익렬은 또한 행운아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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