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은 제주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논설위원

학부 2학년이 되던 봄학기였다. 내가 택한 교양강좌의 제목은 ‘여성학’이었다. 딱히 페미시스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여성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문제에 관해 너무나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교양동의 꼭대기 강의실까지 헐떡거리며 올라가보니, 놀랍게도 대다수의 수강생은 남학생이었다. 물론 캠퍼스 내에 여학생이 희귀동물(?)이었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남학생들이 여성학에 관심을 가지다니 역시 상아탑은 다르구나, 눈물이 날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감동은 몇 주 지나지 않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나와 같은 발표조의 남학생들이, 이 강의가 여성심리학 쯤에 관한 수업이라고 착각해서 여자 꼬시는 법을 배우러 온 거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미투(MeToo) 운동이 시작된 것은 올해 초 서지현 검사가 검찰내부통신망에 자신이 당한 성추행 사실을 밝히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이다. 당시 많은 남성들의 반응이 ‘검사도 성추행을 당하는구나’라는 놀라움이었다면 여성들의 반응은 ‘검사정도는 되어야 성추행 당한 일이 공론화되는구나’였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 중 한 번도 비슷한 경험이 없었던 사람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아마 ‘맹세코 나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항변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딸 같고 동생 같아서 이성의 어깨나 등을 만지거나 안아줬던가,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라며 술 한잔 따라보라고 강권했거나, 상사 옆자리에 굳이 여직원을 끌어다 앉히거나, 부르스 한 곡 춰드리라고 여직원 손을 상사 손에 쥐어 주었던 등등의 장면이 하나쯤 들어있을 것이다. 비록 이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위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그저 모임을 흥겹게 하는 재미난 이벤트라고 생각하면서 맞장구를 치거나 적어도 못 본 척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처 그것이 성범죄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혹자들은 이제 지겹다, 왜 여성들은 남성들을 모두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이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나 오해를 살까봐 두렵다면서, 아예 여직원들과는 회식도, 업무미팅도 하지 않고, 앞으로는 여직원을 뽑지도 말아야 겠다는 분들도 있다. 어디까지가 친밀함의 표현이고 어디까지가 성추행인지 몰라 곤혹스럽다는 분들도 많다. 미 대법원 판사인 포터 스튜어트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포르노를 정의 내리기는 힘들지만, 보면 알 수 있다.’ 어디까지가 성희롱인지, 성추행인지 명확히 정의하긴 어렵다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는 ‘친밀감’과 ‘끈적함’의 미묘한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점은, 미투 운동의 본질은 여성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조직 내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이며 약자인 것이 보통 여성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치 남성 대 여성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의 한 형태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부당하게 취한 것이 성적인 것이었을 뿐, 일상적으로 갑이 을에게 행하는 부당한 요구와 다를 바 없다. 성범죄로만 한정해 보더라도 피해자가 모두 여성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군대에서, 학교에서 종종 동성간 성희롱과 강제추행 등의 성폭력이 발생한다. 권력관계에 기반한 강압적 권위주의가 존재하는 한, 미투로부터 자유로운 성별도, 성역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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