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영 제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소장·논설위원

또 다른 성차별 '펜스룰' 확산 우려
남성 중심 조직·사회 문화 바꿔야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은 많은 여성들로부터 공감을 받았다. 소설 속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은 현실과 다르지 않고 너무나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이 땅에서 "여자는 그러면 안된다. 여자가 어떻게 그러냐" 등의 성차별적 발언을 듣지 않고 자란 여성은 드물 것이다. 부당한 대우에 대응도 해보지만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성희롱이나 성폭력에조차 입을 다물게 된다.

피해자가 조롱받고 제대로 된 도움조차 받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에 눌리는 것이다. 김지영은 죽은 사람에 빙의해 속마음을 쏟아 내야할 만큼 이사회엔 억압된 고통의 분출구가 없었다.

그동안 침묵해왔던 수많은 이 땅의 '김지영'들이 용기 내어 피해사실을 공개하고 나섰다. '미투(#Me Too)'운동의 확산이다. 전 세계 80개 이상 국가에서 미투 해시태그를 통한 성폭력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사회 각 분야의 권력형 성폭력의 심각성은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검찰·문화예술계·교육계를 넘어 정치권으로까지 불어 닥친 미투는 한국 사회에서 권력에 짓밟혀왔던 여성인권을 향한 적극적 외침이다.

그런데 지금 '펜스룰(Pence Rule)'이 확산되고 있어 미투운동의 취지가 훼손될까 우려스럽다. 펜스룰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2002년 인터뷰에서 "아내 외의 여자와는 절대로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언행을 보다 신중히 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최근 미투운동에 대한 '반발'처럼 남성들이 직장 내 여성과 접촉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통칭하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미투운동이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펜스룰'을 따르려는 남성들이 늘었다고 한다. 성폭력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기 위해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직원을 회식에서 배제하고 업무지시도 SNS로 하는 등 펜스룰에 편승한 차별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남성위주의 사회를 더욱 공고히 다지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고 본다. 

임원으로 올라갈수록 여성이 적은 '유리천장'의 차별에다 조직문화가 더욱 왜곡될 소지가 크다. 여성채용 기피 현상 등 펜스룰을 가장한 조직 내 성차별이 더욱 우려되는 상황이다. 펜스룰이 미투운동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미투에 가장 기본적인 대응책은 직장 내 성추행이나 성폭력 관련 매뉴얼 작성 및 교육과 지속적 관리다. 비슷한 일이 터질 때마다 이미 해 왔던 신고센터 설치, 일시적 캠페인에 그치지 말고, 기본적 대응과 동시에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에 접근해 해결해야 한다.

미투가 그동안 억눌려왔던 권력형 성폭력 문제에 강력한 경고를 보내는 만큼 무엇보다 남성중심의 조직문화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조직이나 지역사회에서 여성들도 중요한 자리를 맡을 수 있도록 여성임원 할당제와 함께 직종별로 여성리더들을 양성하는 아카데미를 정기적으로 실시했으면 한다. 남성중심의 조직, 기업문화를 바꿔나가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개발, 운영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또한 미투를 외치는 피해자가 신고나 조사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인권보호관과 같은 지원체계도 구축돼야 한다. 일부 언론의 선정적 보도나 폭로성 기사, 가십처럼 다루는 보도의 행태도 개선돼야 함은 당연하다. 

그동안 여성운동이 진행되면서 많은 부분이 변화됐다고 하지만 현실에서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지금이라도 미투운동을 통해 사회 전반에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투는 성범죄에 대한 엄중한 인식,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고발을 넘어 여성과 남성 모두가 행복한 양성평등 사회로 가는 또 다른 시작이다. 더 이상 '김지영'이 일반화되지 않기를, 그녀가 겪었던 일상적 차별에 마주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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