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 문화부국장 대우

"이 땅에 봄이 있느냐"는 피맺힌 70년의 절규에 "봄이 오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꼬박 12년 전인 2006년에는 '하나 하나 매듭 짓겠다'던 약속을 받았었다. 어찌 됐건 국가수반인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니 언젠가는 지켜지리라 믿어 본다. 그 보다는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던 작업들에 대한 언급에 더 마음이 간다. 문재인 대통령은 4·3 추념사에서 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의 노력과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됐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예술인들을 열거하며 그 노력에 고마움을 전했다.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다. 흔한 수상 소상이 그러하듯 미리 신경 써 준비했어도 빠진 자리가 있다. 4·3진상보고서 등의 기초 자료가 됐던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나 제주4·3의 상징곡이나 마찬가지인 '애기동백꽃의 노래' 등은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화예술'과 '기억'의 역할이다. 제주4·3 문화예술의 양대 산맥인 현기영 소설가와 강요배 화백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4·3 70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쏟아지는 강연 무대에 서고 있는 현기영 소설가는 "4·3 학살보다 무서운 건 망각"이란 말을 강조한다. 노 소설가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말하겠냐"며 가방을 쌌다 풀었다 한다. 4·3 주제 전시 에 중심에 있는 강요배 화백은 "직접 그 비극을 겪었다면 할 수 없었을 일이다. 그들의 경험을 기억하기 위해 그렸다"며 '4·3작가'란 평가에 손사래를 친다.

4·3과 관련해 국가수반으로 첫 사과를 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도 추도사에서 "엄청난 고통과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역사가 되고, 역사의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도 수 십 년이 흐르면 제주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 분노와 불신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믿음, 화해를 가리켜주는 그런 중요한 상징물이 될 것"이란 기대를 전했었다. 이번 70주년 추념사 내용은 '기억투쟁 70년, 예술로 들춰낸 4·3의 기억'이라는 2018 4·3 70주년 기념 문화예술축제의 슬로건과 맞닿는다.

4·3 70주년을 맞아 '고향의 봄'을 만난 사람들도 치열한 기억투쟁 속에 살았다. '조선적'(朝鮮籍)으로 살아가는 재일제주인들 중 일부가 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제주 땅을 밟았다. 4·3 60주년 당시 '4·3으로 떠난 땅, 4·3으로 되밟다'는 구호 아래 제주를 찾은 이후 이념에 발목이 잡히며 다시 오지 못했던 이들도 많다. 정권이 바뀌고 평창 동계올림픽이란 계기까지 보태지며 지난 1월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들의 방한에 필요한 여행증명서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8일 이내에 발급해주도록 지침을 개정하면서 기회가 열렸다. 이번이 14번째 제주 방문인 고령의 김석범 작가가 위령 제단 앞에서 눈물을 흘린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제주에서 4·3이 그러하듯 누구에게나 잊지 못하는,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평화롭고 행복했던 때라면 더 간절해진다. 이산하 시인이 '한라산'에서 '…한국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끔직 했던 집합 기억은 절대 잊혀 지지 않는다. 제주4·3이 대한민국의 아픈 손가락이면, 조선적으로 살고 있는 자이니치 제주인들은 제주의 아픈 손가락이다. 고향 땅을 밟은 이들이 아직은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것을 꺼리는 현실이지만,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는 '열어 줘 제발 다시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나 돌아갈래, 어릴 적 꿈에, 나 돌아 갈래 그곳으로'하는 대중가요가 무한 반복되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고향이란 단어와 만나면 저절로 눈물이 나는 봄이다. 그 때까지 칼날을 물고 잠들어도 좋으니 그 '봄'에는 이들까지 가슴에 묻었던 이름을 꺼내 '고향의 봄'을 목 놓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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