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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이야기 기록유산 등재 무산제주4.3을 기록유산으로2 <6> 보듬지 못한 아픔 '위안부 기록물'
고영진 기자
입력 2018-04-08 (일) 18:12:22 | 승인 2018-04-08 (일) 18:21:13 | 최종수정 2018-04-08 (일) 18:21:13

꽃처럼 곱던 소녀는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 일본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하는 등 모진 삶을 살았다. 채 피어보기도 전에 시들어야 했던 소녀들의 이야기는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했지만 고배를 마신다. 국제사회에 전쟁으로 인한 여성인권의 침해의 비극을 알리고 피해자들이 가슴에 응어리진 한(恨)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작업이 미뤄진 것이다. '위안부 기록물'이 걸어온 길을 되짚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살펴봄으로서 제주4.3의 미래를 설계한다.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동원돼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가 여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해 강압·지속적으로 집단적인 성폭력을 가한 것이고 피해여성들은 삶의 조건이 '노예'와 같은 상태였다는 점에서 현재 UN 등 국제사회에서는 성노예(military sex slavery)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안소는 군이 직접 경영하는 위안소, 민간에 경영을 맡기는 군 전용 위안소, 민간의 유곽 등 군이 일시적으로 지정해 이용하는 위안소 등의 유형이 있다. 군 위안부 제도의 창설, 유지, 운용의 주체는 일본군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괴되거나 속아서 '위안부'가 됐다. 이러한 범죄행위를 일본군이 조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와 일본군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됐다가 살아남은 여성들은 귀국도 여의치 않았다. 일부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현지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일본군이 패전 후 '위안부'를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피해 여성들은 '돌아갈 방법을 구하지 못해서',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타국에 눌러 앉는 경우도 많았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귀국 후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으로 고통 받았다. 구타 및 가혹행위로 인한 외상, 불임, 성병 등 직접적인 후유증이 오랜 시간 피해자들을 괴롭혔다.
또 자신의 몸에 대한 자결권을 가지 못했다는 모욕감, 피해 사실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야 할 불이익과 낙인에 대한 두려움, 삶의 패배감, 우울증 및 불면증 등의 심리적 외상 등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피해 사실 때문에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피해자는 빈곤의 악순환에 몰리기도 했다.

△소녀들의 상처 역사로
1991년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자임을 당당히 밝힌다. 1990년 6월 일본 정부가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폭로하고 피해 실상을 공개 증언한 것이다.

처음 한 여성의 작은 목소리에서 시작된 문제는 지금 당당하게 여성인권을 주장하게 됐다. 세계의 시민들이 이 목소리에 공감했고 공감의 흔적을 역사에 길이 남기려고 하고 있다.

2016년 5월 한국과 중국, 타이완, 일본, 네덜란드,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한다.

등재를 신청한 자료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관한 공문서 및 사문서 563건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문서 1449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 활동 기록물 732건 등 모두 2744건이다.

△ 위안부 기록물 등재 추진 과정 
2013년 10월 공청회를 통해 한국여성가족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 방침을 결정한 이듬해 11월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사업단이 발족돼 공동등재를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한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 목록 작성, 관련 단체 간담회, 한국위원회 및 국제연대위원회 결성, 기록유산 공동등재 신청서 사인회 등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한다.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16년 5월 9개국 15개 단체 및 기관 명의로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 접수를 완료한다.

이듬해인 지난해 4월 등재심사소위원회 중간 평가 결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은 '대체 불가능하고 유일한 자료'라는 평가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위안부를 홀로코스트와 캄보디아 제노사이드에 비유한 부분에 대한 삭제를 요구받고 수정해 다시 제출한다.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이 정치적 긴장을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해 일본 우익단체들이 제출한 기록물과의 대화를 권고한다.

△위안부 기록물 등재 추진 어려움
위안부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우선 일본 정부는 위안부 기록물의 기록유산 등재가 추진되자 이를 막기 위해 지난해 유네스코 분담금 37억5000만엔(한화 420억원)의 지급을 보류하는 등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한다. 현재 일본이 세계에서 유네스코 분담금을 가장 많이 내고 있다.

특히 일본 정부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등재 방해 외교를 펴기도 했으며 일본 우익단체들은 위안부 기록물 등재를 방해하기 위해 같은 기록물을 등재 신청하기에 이른다.

또 중국과 대만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도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중국이 대만을 국가가 아닌 하나의 지역으로 취급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다. 이에 국제연대회의는 대만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해 대만과 중국이 서로 타협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제주4.3에 주는 교훈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기록유산 등재 추진 과정은 제주4·3에도 교훈을 준다.

제주는 '제주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목표만 정해졌을 뿐 구체적인 등재 대상이나 계획, 방법 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위안부 기록물은 조선통신사 기록물과 마찬가지로 '국제공동 등재'를 통해 신청을 마쳤다. 문화재청 공모와 한국위원회 심사 등의 과정이 생략된 셈이다. 이는 대만2·28과 기록유간 공동등재를 위한 연구사업을 추진키로 한 제주4·3이 참고할 부분이다.

이와 함께 지난달 30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9명으로 줄었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제주4.3 희생자도 고령이다. 4.3 생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4.3의 기록이 세계인의 기록으로 후세에 남겨지는 것은 하루 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동안 음지에서 숨죽여 지내던 제주의 역사는 수많은 도민의 노력으로 양지에 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이제 빛을 보기 시작한 제주4·3이 찬란한 빛의 역사로 남아 세계인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제주가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평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제주4.3 한국에서 인권 유린한 가장 비극적인 일"

한혜인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 사무단 총괄팀장

"제주4.3의 기록물은 한국에서 인권을 유린한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고,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사실이라는 점에서 위안부 기록물과 유사합니다"

한혜인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공동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 사무단 총괄팀장(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아직도 지구의 한편에서는 국가권력이나 이데올로기, 종교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제주4.3 기록물이 반드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기원한다"고 강조했다.

또 "아픔을 잊지 않고 조금씩 증언해 왔던 수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들의 노력을 세계가 들어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줬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위안부 기록물 기록유산 등재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도 토로했다. 

한 총괄팀장은 "지난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한일 합의 이후에 예산지원이 없어져, 2016년 5월 등재신청서를 낼 때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며 "이후 서울시에서 지원을 해주었고, 문재인 정권으로 바뀐 이후에 다시 정부의 지원을 받게 돼 기록유산 등재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등재 추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일본정부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등재 방해 외교였다"며 "일본의 우익단체들이 모여 위안부 기록물 등재를 방해하기 위해 그들도 등재신청을 해 결국 유네스코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보류 결정을 하게 했다"고 회상했다.

고영진 기자  kyj@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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