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세포(細胞)가 분열할 때 등장하는 것이 염색체(chromosome)다. 남녀에 걸친 수치가 47 : 48임으로, 성별(性別)구성에서 '여성이 우세한 모습'이다. 그런데 따른 것인지, 여성들은 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으며, 원시시대부터 '여성이 주도'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를 입증하듯 제주도에는 "설문대할망의 설화"가 전해져왔다. 거체(巨體)이면서 사내들을 제압해온 '용맹한 모습'이다.

한라산을 베게삼고 누었어도, 다리는 오름으로 받혀있고, 발은 섬과 바다에 닿아있다. 이와 같은 '선천(先天)성에 근거'한 것인지, 제주여성들은 겨울에도 '차가운 바닷물'에 들어가, 잠수질로 생계를 유지해온 용감성을 보여 왔고, 오늘날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모계(母系)사회의 시범을 보여 온 모습이다. 생명을 담보하는 용기가 없고서 불가능한 일이며, 자비로움을 겸비해온 수용(受容)자세다.

역사시대에 들어와 김만덕은 '대표적인 제주여성상'으로 알려졌다. 조실부모하고 가난한 것이 원인이 되어 '기생집으로 입양'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객주(客酒)집을 경영'하는 위치에서, 돈을 벌게 되었음으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흉년을 맞이했을 때, 모아둔 재산처분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도와온 점'이다. 무소유의 실천이며 '구휼(救恤)정신을 발휘'해온 시범사례다.  

그러면서도 '영조(英祖)대왕을 배알'하려는 꿈까지 실현하는 한편, 금강산구경으로 이어진 용맹성을 보였다. 오늘날사라봉에 '의인(義人)탑을 건립'하고, 추모해온 것도 이런데 연유한 것이다. 이후 제주도에는 '봉려관이란 여승'이 등장했다. 스님은 바다건너해남의 '대흥사에서 수행'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제주도의 불교중흥시대'를 연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를 기해서 관음사를 비롯하여, 한라산동서남북에 걸쳐 '수많은 사찰건립과 복원(復元)'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에는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해 "봉려관선양회까지 발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여승(女僧)활동은 불교계에 한정되지 않고, 대일(對日)항쟁으로 이어져 왔다.이것이 신앙과 애국심에 걸쳐 '시범을 보여 온 제주여성상'으로, 높게 평가해온 근거다.   

일제말기에는 홀로 '상경한 백난아(오금숙)'가 가수대열에 올라 "찔레꽃"이란 노래를 불러 '오늘의 애창곡'으로, 위상을 굳히었다. 명월에는 국민가수비와 함께, 기념공원까지 조성해놓은 상태다. 이후에도 '제주여성의 용감성'은 계속되었는데, 연예계를 대표해온 고(高)모씨, 민속의상분야를 이끌어온 고(高)모씨, 법무장관을 지낸 강(康)모씨, 골프계에서 세계적 명성을 알린 박(朴)모씨가 있다. 모두가 '현재진행형의 개척자(pioneer)'들이다.  

이와 같이 공인된 '용감한 여성상'과는 달리, 입증되지 않은 채 '설화(說話)로 떠도는 일'도 없지 않다. 오(吳)모씨는 대표적인데, 중학교를 막 졸업한 소녀(少女)신분으로, 광복이후의 혼란기에 '남제주의 60여개마을'을 대표하여, 안전을 위해 앞장서왔다. 이때에 여성청년단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남성중심의 청년조직'을 견제해왔다. 

이를 계기로 남녀평등에 근거한 '개병(皆兵)제도까지 출범'시켰다. 일본인을 제압해온 용맹한 부친기질, 학창시절 역사의식에 눈을 뜨게 한 '스승의 가르침'이 주효했다. 그 결과 '잔 다르크(jean of Arc)의 애국심'을 떠올리며, 헌신적 자세를 보여 왔다. 한국동란 때에는 젊은 여성들을 이끌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면서, 진충보국(盡忠報國)을 실천해왔음으로 '잔 다르크를 재현'한 모습이다.  

보다 발전된 미래를 위하여 '주변에 잠재(潛在)한 역사적 흔적'에 대하여, 발굴과 평가로 이어지는 일이야말로 '도민들에게 안겨준 현안과제'로 남고 있다. 또한 '선인(先人)들의 정신계승'과 병행해서, 자료가치를 발휘할 때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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