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필 제주관광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논설위원

잔인한 달 4월에 착잡한 소식을 또 접했다. 이달 초, 충북 증평에서 40대 엄마가 4세의 어린 딸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발견된 유서에는 "남편이 숨진 뒤 너무 힘들다. 딸을 데리고 간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사고가 알려지면서 제기되는 문제와 해결은 남편을 잃고 생계가 어려워 진 부분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존권을 박탈당했다는 것보다 심각한 사안에는 주목하질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이 알려지자 도마에 오른 건 허술한 복지안전망이다. 4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송파 세모녀의 생계형 동반자살이후, '송파 세 모녀법'으로 불리는 3개 법안이 마련돼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이 증평 모녀에게는 작동하지 않았고 복지 사각지대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보건복지부는 신속하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위기 가구'의 범위를 확대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위기가구 발굴 대상의 범위를 가구주가 사망하거나 주 소득자가 소득을 상실해 급격히 생활여건이 악화된 가구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 요체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보다 촘촘하게 사회안전망이 정비된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어선 안 된다. 4세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죽임을 당했다. 아이들은 어른과는 다른 삶의 기회와 가능성이 있다. 부모라 할지라도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아직 우리사회는 극한 상황에 놓인 부모가 자살을 하면서 어린자녀를 동반하는 행위에 대해서 비난보다는 오죽하면 이라는 온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부모의 처지를 중심에 놓고 해석하고 '동반 자살'이라고 흔히 표현한다. 

하지만 '동반자살'은 최소한 자살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가능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선택권이 없고 판단 능력이 부족한 어린자녀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타살이며 아동 학대이다. 학계 용어로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 한다. 

왜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자녀 살해 후 자살을 하는 부모의 대부분은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 남겨진 아이가 겪을 일'을 생각하면 아이를 두고 혼자만 갈 수 없다는 말을 남긴다. 어린 자녀가 혼자 남았을 때 주변 이웃이나 복지제도를 통해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 즉 '복지안전망과 공동체에 대한 불신', 그리고 '자녀의 생명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뒤틀린 인식'이 맞물려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지고 있음이다. 

자살을 하며 자녀의 생명을 마음대로 빼앗아 간 부모에게 응분의 분노를 느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겠다. 낯이 뜨겁다. 부모 없는 아이를 내 자식처럼 거두어 주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이탈된 요보호 아동에게 제공되는 입양과 가정위탁이라는 제도가 있다. 입양은 법률상 친자관계를 맺고 양부모가 돼 자녀로 키우는 것이고 가정위탁은 일정기간동안 대리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워주는 제도다. 친부모는 아니지만 가정의 울타리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양부모나 대리 부모로 선뜻 나서는 사람이 드물다. 

또 다른 비극, 또 다른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어린자녀라 할지라도 독립된 인격체라는 인식의 전환과 자살로 부모를 잃은 아이의 경우에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아동복지서비스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체된 가족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공동체 역할이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 "어린이는 신이 인간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보낸 사신"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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