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논설위원

오늘은 한국 민주화의 첫 신호탄이었던 4·19혁명 58주년 기념일이다. 엊그제 4월 13일이 일제강점기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의 결실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해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날이었다면 오늘 4월 19일은 왕조시대와 식민지시대를 거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이 비로소 자유·민주의 숨결을 느낀 날로 기록된다.

또 올해 4·3 70주년에 맞추어 4·19를 기억하는 것은 또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다. 4·3 대학살 이후 10여 년 만에 제주지역에도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돼 파묻혔던 4·3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4·19혁명은 제주도민들이 이승만 반공 독재체제 하에서 4·3에 대하여 가졌던 공포감에서 벗어나 누적된 불만을 한꺼번에 분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4·19 직후 '무고한 양민학살' 담론이 신문기사를 통해 형성돼 갔다. 10여 년간 입을 굳게 다물었던 4·3 피해유족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 시기에 4·3희생자를 '죄 없는 양민'으로 보는 주민들의 보편적인 인식이 확산됐다.

1960년 5월, 제주대학생 7명으로 조직된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는 '제주신보'에 게재한 호소문을 통해 '인간의 탈을 쓴 야수와 같은 행위로써 양민학살, 방화 등을 자행한 주동자와 졸도들을 고발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죄 없이 죽어간 원혼을 위령할 것'을 정부와 제주도민들에게 호소했다. 

이어서 5월 27일에는 모슬포에서 유가족 등 주민 60여명이 집회를 열어 4·3 당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호소했다.

1960년 6월 6일 대한민국 국회의 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조사단이 하루 동안 제주도 현지에서 4·3의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당일 제주도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국회조사단의 증언 청취 자리에서 10년 동안 한을 품어온 희생자 유족들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들은 모두 학살 당시의 불법성과 잔인성을 폭로하고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했다. 당시 국회와 지역 언론의 4·3에 대한 규정은 '양민학살 사건'이었다.

1960년 7월 '조선일보'에 4·3의 실상을 기고한 고창무는 "일주도로를 경계로 해 산촌부락은 전부 소각하는 가혹한 작전을 감행하니 잔여 부락은 해안선에 연(沿)하여 있는 부락뿐이었다.

소각당한 부락민은 불의의 변을 당해 해안부락에 이거(移居)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입산하니 25만 도민을 적으로 만든 기묘한 작전이었다"라고 해 정부 진압작전의 무모함을 비판했다.

4·19 이후 민주화시기에 4·3희생자에 대한 기억은 국가가 강제한 '빨갱이' '폭도' '공비'에서 '무고한 양민' '죄 없는 희생'으로 변했다.

제주도민들은 국가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과제를 실천해 주기를 바랐고, 특히 가해자 처벌의 요구도 봇물같이 쏟아져 나오게 됐다.

하지만 1960년 열린 4·3 해결의 물꼬는 다음해 5·16 군사정변으로 다시 막혀버렸다. 이로부터 20여 년간 군사정권의 억압체제 속에서 4·3 논의는 금기시됐다.

반공법·국가보안법과 연좌제의 억압기제는 4·3에 대한 발설조차 못하게 했다. 도민의 입을 통해서 4·3 증언은 기대할 수 없었고 4·3 인식과 담론은 국가권력이 독점했다. 대다수 지역민은 '억울한 희생'이라는 말조차 공개적으로 하지 못했다.

4·3에 대한 발설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이 전개되면서 다시 가능해졌다. 4·3을 작은 저항과 억울한 떼죽음의 역사로 규정하는 것은 민주와 자유의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과정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전 국민이 공감하는 4·3의 공적(公的) 인식이 가능할 것인지 모르겠다.

냉전과 분단이 가져온 비극적 집단희생인지라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4·19가 가져온 4·3의 재인식이 완결되는 날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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