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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제주4.3을 기록유산으로2 <7> 민주주의상징 4·19혁명식민 국가 최초 민주화운동...제 3세계 선행적 모범으로
고영진 기자
입력 2018-04-22 (일) 15:12:00 | 승인 2018-04-22 (일) 15:29:52 | 최종수정 2018-04-22 (일) 19:29:16
4·3 평화공원.자료사진

4·19혁명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전국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 일으킨 반독재·비폭력 학생운동이다.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로 시작될 만큼 4·19혁명은 민주주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의미와 상징성을 갖는 '4·19혁명 기록물'이 세계인의 기록으로 각인되기 위한 세 번째 도전에 나선다.

4·19혁명의 원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을 당시에는 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흘러가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 이승만 정권은 1960년 민주주의를 유린한 3·15부정선거를 자행한다.
3·15부정선거 직후 마산에서 이에 항거하는 대대적 시위가 발생한다. 평화적 시위였음에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이에 비슷한 시위가 포항, 대전, 수원, 오산,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들불처럼 번진다. 또 교수와 언론인, 변호사들은 단체를 조직해 시위 학생들 지원을 위한 공개 성명을 발표한다.

역사에 '피의 화요일'로 남아 있는 같은 해 4월 19일 경찰은 맨몸으로 거리에 나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날 하루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이 목숨을 잃는다.

이러한 남녀노소를 망라한 전 국민적 저항에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은 막을 내린다.

민주주의의 찬란한 금자탑

4·19혁명은 민주주의역사가 일천한 사회에서도 반독재의 국민적 저항을 통해 민주주의를 급진전시킬 수 있음을 국내·외적으로 보여줬다. 나아가 4·19혁명은 그 뒤를 이었던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6년의 촛불항쟁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다.

특히 4·19혁명은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명시된 민주주의와 통일의 기본이념으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학생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 최초의 민주혁명이라는 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4월 혁명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역사가 지향해야할 방향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됐고 인간의 기본권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됐으며, 관권과 경찰의 폐단이 감소했고, 법치주의가 상당부분 자리 잡았다.

이와 함께 4·19혁명은 당시 일본에서의 안보투쟁, 터키에서의 반메데르스 시위, 대만의 지방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남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대만 등 아시아의 다른 미동맹국들에서 진행된 정치상황에 간접적이지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4·19혁명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민주화과정은 제3세계 국가들의 민주화 경로에 있어 하나의 선행적 모범을 제시해주고 있다.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기 위한 여정

4·19혁명 기록물 등재 대상은 국가기관 생산 자료와 국회·정당 생산 자료, 신문자료, 학생·시민 생산 자료, 사상자 기록·수습활동 자료, 사진·영상 자료, 박물류, 외국 자료 등 모두 8개 주제에 1449점이다.

지난 2013년 4·19혁명 유네스코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4·19혁명등재추진위)가 출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작업을 총괄하고 있다.

4·19혁명등재추진위는 지난 2013년과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도전하지만 아쉽게도 실패하는 아픔을 겪는다.

앞서 두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4·19혁명등재추진위는 지난해 4월 27~5월 12일 진행한 문화재청의 '2018년 세계기록유산 및 2017년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 등재신청 대상 기록물 공모'에 응모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6월 27일 회의를 열어 "4·19혁명 기록물은 식민지였던 국가들 중 최초의 민주화운동이며 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으로 세계적 중요성이 입증된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이와 함께 "이미 등재된 5·18민주화 기록물과 차이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덧붙인다.

이어 4·19혁명 기록물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 선정한다.
4.19혁명 기록물은 올해 등재 신청 절차를 거쳐 내년 유네스코에서 최종적으로 등재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화해·상생 정신 세계인의 가치로

제주4·3은 섬의 기억을 넘어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기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아직 과제가 산적한 것도 사실이다.

제주도는 최근 행정자치부에 4·3 세계기록유산 등재 준비에 소요되는 국비 2억원을 신청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올해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서 4?3기록물의 기록유산 등재 추진을 밝혔다.

하지만 정부나 NGO 등이 중심이 돼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다른 기록물과 달리 제주4·3은 아직 구체적 추진 주체가 정해지지 않았다.

더구나 4·3사건(1948~1954년) 당시에 남아 있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고, 원본 역시 국내·외에 분산돼 체계적인 발굴에 난관이 예상되고 있다. 1948~1949년 군법회의 사형수·무기수 명단 868명과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감금됐던 3430명의 수형인 명단을 비롯해 재판기록과 군·경기록은 국가기록원이 원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라리 방화사건 필름과 미군정 보고서 등 중요 기록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원본을 보유, 일부만 복사본으로 확보한 상태다.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제주4·3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빛을 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생존 희생자와 유족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보듬어 올곧은 역사로 남기기 위해서는 기록유산으로 남기는 작업이 중요하다. 제주4·3이 기록유산으로 등재돼 화해와 상생의 4·3정신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그날 제주가 진정한 세계인의 평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제주 4.19 민주혁명 기념탑

제주의 강한 비바람에도 민주주의의 횃불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타오르고 있다. 바로 제주시 연동 419번지 일대에 세워진 '제주 4.19 민주혁명 기념탑' 이야기다. 

이 기념탑은 지난 2015년 4월 19일 첫 삽을 뜨기 시작해 같은 해 11월 23일 지금 자리에 조성됐다. ㈔제주4.19기념회(회장 강영석)에서 건립을 요청한지 3년여만이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다. 3.1운동으로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면 4.19는 그 민주공화국이 제대로 서도록 국민의 힘으로 바로잡은 첫 번째 사건이다.

제주에서는 4월 27일과 28일, 29일 사흘에 걸쳐 거도적인 4·19민주혁명이 들불처럼 일어나 불의와 부정, 부패를 뿌리 뽑고 개혁과 혁신, 민주화의 성과를 거뒀다.

기념탑은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유공자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기념탑의 횃불은 국민의 참여만이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한편 제주도와 ㈔제주4·19기념회는 매년 기념탑 앞에서 4·19혁명 당시 불의에 항거한 유공자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4·19민주혁명 기념식을 엄수하고 있다.

고영진 기자  kyj@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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