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겹친 5월을 맞이해서 '신라시대의 최치원'을 떠올려본다. 12세의 어린나이로 당나라유학길에 올랐고, 타국 땅에서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총명하고 진취적 기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唐)나라는 '당시 대국위상을 굳혀'왔을 뿐 아니라, 삼국통일에도 영향을 미쳐왔음으로 '한민족에게 이상(理想)국'처럼 비쳐졌다. 오늘날의 미국에 비유됨으로 '기러기가족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하지만 유학방법에서는 오늘날처럼, 항공편을 이용한 '단기간의 가족동반'이 아니라, 배를 이용한 '장기간의 홀로여행'이었음으로, 외로움과 고통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심정을 반영한 것인지 '아호마저 고운(孤雲)과 해운(海雲)'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에 떠있는 '외로운 구름'이었음으로, 양떼구름과는 달랐다. 오직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열망에서, 오늘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시유학생은 수량에서도, 오늘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한정적이다. 그런 까닭에 선진국을 향해서 '유학풍토를 조성해온 선구자'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최치원이 당시 '오늘날초등학생에 해당'하는 어린이란 점이다. 외국유학마저 '부모가 결정'한 것이었음으로, 소년신분으로 이를 수용-실천한 자체도 '효심이 없고서 불가능'하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를 노닐며 '바다건너의 별천지를 동경'해온데 따른 것이었다.  

오늘의 부산해운대에는 최치원동상이 세워졌는데, 어린 시절 '돌멩이로 높다란 대(臺)'를 만들고, 그 위에서 '바다건너의 별천지'를 바라보며, 동경해온데 따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에 떠있는 구름에 꿈을 심어'온 것도, 성장환경이 갖는 효험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육두품(六頭品)이었음으로, 왕족다음의 귀족신분이었다. 하지만 '욕심을 억제하지 못한 탓'인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당나라유학을 강요하게 되었고, 현지에서 과거급제하지 못할 경우, 내 자식이 아니라'는 극언(極言)까지, 쏟아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읽는 소리'가 주변을  향해 번질 만큼 '총명성을 인정'해온데 이유는 있었다. 이때를 기해서 고운도 마음을 다졌는데 '인백기천(人百己千)이란 결의'였다. 사람들이 백가지를 이룰 경우, 나는 천개를 이룰 것이란 '차별적인 자신감'이었다. 

중요한 것은 차별성을 앞세우며 '십진법(十進法)의 성과'를 얻어내려는 굳은 의지였다. 부친의 강요에 의한 것이더라도, 당사자의 능력을 갖추지 않고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자식의 천부(天賦)적 재능'을 인정해온 부친의 혜안(慧眼)도 중요하지만, 부모의견을 존중하며 '실천해온 아들의 순종적 자세'야말로, 철부지의 어린이와는 달랐다. 천부적 재질과 함께 '결연한 의지'를 엿보여왔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풍범(風帆)을 이용'한 홀로여행이었음으로 '심신에 걸친 고통'이 따를 것은 당연하다. 이후 과거에 급제한 상황에서도 '직책마저 부여받지 못해온 한 때'가 있었음으로, 어린 고운에게는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계원필경에는 '지위영친(只爲榮親), 본구식록(本求食祿)'이란 글귀가 나온다. 전자가 '부친을 위한 영예'를 떠올린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임으로, 양면(兩面)성을 겸비해온 모습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귀국길로 이어졌다. 하지만 귀국한 다음, 벼슬은 함안과 정읍의 태수(太守)에 그쳤음으로, 인재를 사장(死藏)시키며 '파당(派黨)정치만을 앞세워'온데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고운은 실망과 더불어, 해인사로 들어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지만, 의지를 앞세운 역사인물임에 틀림없다. 절해고도(絶海孤島)로 알려진 제주도야말로, 이를 시범으로 삼으며 인재양성과 인물배출로 이어지도록 '먼 훗날의 장래를 치밀하게 설계'해, 나갈 때임을 암시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