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벌어지는 우산 쟁탈전은 어릴 때나 나이 들어서나 여전하다. 집에서 제일 좋은 우산은 언제나 부지런한 사람 몫이다. 어쩌다 늑장을 부리는 날이면 늘 남게 되는 것은 살이 나간 것이나 비닐 우선 정도다. 검정 우산, 빨간 우산, 초록 우산, 파란 우산, 무지개 우산, … .

그동안 산 우산 수를 헤아리면 수도 없을 것 같으나 여전히 모자란 게 우산이다. 그래도 쓸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으나 요즘은 우산도 패션이라 살이 나간 우산은 여간해서 들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살이 나간 우산을 펴서 맘 잡고 깁기를 해본다.

우산살을 잡고 이리저리 처매보지만 영미덥지가 않다. 지난번 모임에 가서 어딘가에 놔두고 온 우산이 애석하기만 하다. 갈수록 늘어가는 건망증을 탓할 뿐이다. 

전깃줄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을 보니 우산 쓰고 여유롭게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다. 이보다 더 비가 세게 오면 걸음이 빨라져서 여유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비를 막기에 급급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면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도 진풍경이다.

그림책 속 풍경이 절로 그려진다. 마치 류재수의 <노란우산>처럼 말이다.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타고 심장까지 내려간다. 빗물이 포도위에 자아내는 무늬는 심장의 소리와 만나 빨주노초파남보의 감정을 불러낸다. 그 감정이 우산 안에서 빙그르르 돌며 발걸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좀 더 느리게, 좀 더 빠르게, 좁게, 또 더 넓게. 둘이서 나란히 혹은 조금 떼어져서. 뱅그르르 뱅그르르…, 퐁퐁퐁. 

비 오는 풍경에 빠져 빨간 우산, 노란 우산, 초록 우산, 파란 우산을 떠올리다보니 엊그제 본 추억의 고전영화 <쉴부르의 우산>(자크 드미, 1964)으로 화면이 넘어간다. 우산가게 아가씨와 자동차 수리공 기이(니노 카스텔누오보 역)의 슬픈 사랑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우산가게 아가씨 쥬느비에브역으로 나온 까드린느 드뇌브의 데뷔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쉘부르의 우산.

화려한 색감과 레치타티보 형식의 대화, 미셸 르그랑의 아름다운 음악이 압권이다. 다시 보니 씁쓸하다. 모든 사랑과 이별에는 한 개인이 넘을 수 없는 시대의 장벽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쉘부르의 우산>은 1957년 영불해협을 마주한 작은 도시 '쉘부르'를 배경으로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전쟁에 참가한 청년 기이의 잃어버린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알제리 전쟁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민족해방전선과 프랑스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아직도 프랑스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의 일부다. 이 전쟁은 알제리의 탈식민지화를 위한 독립전쟁이었으며, 프랑스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 폭격테러, 고문 자행, 성폭력 등이 자행되었다. 전쟁의 결과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고, 프랑스는 막대한 국부를 잃었다. 전쟁 중 프랑스 제4공화국이 붕괴되는 등의 수난도 겪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서 기이는 전쟁 참가 2년 만에 다리에 부상을 입고 돌아온다.

하지만 연인 쥬느비에브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배 속에 있었던 아이와 함께 말이다. 

스토리는 다소 진부하다 할 만 하다. 하지만 화려한 색감의 의상, 헤어, 메이크업 등이 흥미로운 볼거리이다. 의상 협찬은 크리스챤 디올에서 했다고 한다. '크리스챤 디올'하면 뉴룩 패션으로 유명하다.'뉴룩'이라는 말은 1947년 디올의 첫 번째 컬렉션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이었던 카멜 스노우가 디올의 새로운 디자인과 혁신적인 스타일의 쇼를 보고 'It's such a New Look!'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다.

크리스챤 디올의  패션쇼에서는 꽉 조이는 허리, 길이, 볼륨, 관능적인 가슴 등이 드러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디올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통 받고 있던 프랑스 여성들에게 대범한 스타일을 통해 다시금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러한 파격적 시도는 마흔 넘어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만들어 파리 몽테뉴 거리에 뷰티크를 연 그에게 프랑스 여성들만 아니라 전 세계 여성들로부터 열정과 찬사를 받게 하였다. 그의 첫 컬렉션 이름은 '코롤라(Corolla)', 꽃봉오리라는 뜻이다. 

빗방울과 우산, 모두 둥글다는 게 특징이다. 둥글다는 것은 여성의 어떤 욕망을 대변해주는 은유일 수 있다. 생명을 품는 것도 둥글고, 잉태한 생명도 둥글다. 피어나지 못한 씨앗도 둥글고, 각 피어나려 웅크리고 있는 봉오리도 둥글다. 그 안에 무한한 생명력과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여자들의 욕망은 빨갛고, 노랗고, 파랗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장교 한 명이 몇 차례나 춤추자며 나를 못 알아보는 거 있지. 입술은 빨갛게, 눈썹도 예쁘게 다듬어서인가... 아름답다고 하는 게 좋아. 춤을 추고 또 추었지."라고. 할머니가 기억하는 전쟁은 총 쏘고, 다리가 잘리고, 시체구덩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빨간 구두를 신고 싶었고, 가게의 드레스가예뻤고, 장고가 춤추자고 한 게 기뻤고…와 같은 것들이다. 뭐가 뭔지 모르게 전쟁에 참가하거나 소용돌이 속에 한통이 되었지만 여성들이 기억하는 전쟁은 남자들의 폭력과 지배욕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도 피어나는 사랑에 잠 들 줄 모르는 사랑과 열정이 가슴에 움트고 있었다. 여성들이 경험한 전쟁은 이성의 논리가 아니다. 그녀들은 감정으로 기억한다. 이런 사랑과 열정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무감정의 시대야말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이 내장된 폭발물이 아닐까.

수틀리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걸 막아내는 방법은 사랑 말고 그 무엇이 있을까.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는 빗방울에 조금씩 명료해지는 물음 하나.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물었듯이 다시 묻는다.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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