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논설위원

지난 주말 연달아 두 곳의 과학공간이 서울에 문을 열었다. 다른 110여 명의 과학 커뮤니케이터들과 함께 필자 역시 투자자로 참여한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 그리고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를 운영하는 <과학과사람들>의 마포 새 사무실이었다. 삼청동은 쿨했고, 마포는 핫했다. 

갈다는 정신과 의사이자 시국 칼럼니스트였던 아버지 이근후 박사의 옛집을 개조해, 연세대 천문학과 교수였던 이명현 대표가 과학전문서점으로 꾸민 곳이다. 감각적으로 낸 창문 밖으로 오래된 목련나무가 보였다. 고즈넉한 삼청동에 개성 있는 공간들이 앞다퉈 생겨난 끝에, 과학책방까지 등장한 것이다. 개점이 2-3년 미뤄지면서 카오스재단 <블루스퀘어>처럼 비슷한 컨셉트의 서점들이 이곳저곳 먼저 문을 열기는 했지만, 개점 행사에 모인 100여 명의 하객들을 보니 과학기술계 허브라는 기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걸스로봇이 추천하는 페미니즘 과학도서 '핑크&퍼플 큐레이션'도 선보일 예정이고 말이다.

먼저 갈다 이사이며 '작명'을 맡았던 장대익 서울대 교수가 갈다라는 이름에 담긴 뜻풀이를 하고 나섰다. '갈릴레오+다윈'의 이름 첫 글자부터, '실력을 닦다', '판을 엎다'까지 다섯 가지나 됐다. '통섭'의 과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축사와 함께 금일봉을 내밀었다. <한국과학재단>, <국립과천과학관>, <카오스재단>, <동아사이언스>, <ESC(변화를꿈꾸는과학기술인네트워크)> 등의 관계자들이 토론을 벌이고 과학과사람들이 사회를 봤다. 어지간한 한국의 과학기술계 행사나 강연은 다 만드는 이들이었다. 

그보다 하루 먼저 가본 과학과사람들 사무실에는 테라스가 있었다. 문만 열어도 온통 초록인 제주와 달리, 서울서는 한 점 나무가 주는 기쁨과 의미가 작지 않다. 창고형 사무실에서 벗어나 마침내 번듯한 새살림을 났다는 회사 식구들에게는 유사가족의 친밀감이 넘쳐흘렀다. <서울시립과학관> 이정모 관장, 팟캐스트 'K박사'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이강환 관장, '과학계의 성시경' 윤성철 서울대 교수 등 거기 모인 사람들은 팟캐스트를 중심으로 한 회 한 회 인연을 쌓아간 사람들이었다. 필자 역시 유사가족의 일원이 된 것 같은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꼈다. 큰 공간에는 큰 공간대로의 화려함이 있겠지만, 작은 공간에는 또 작은 공간만의 따뜻함이 있다. 팟캐스트 애청자들이 보낸 과자부터 티비까지 다양한 선물들을 보며,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이런 정을 그리워했는지 확 알 것만 같았다.

그렇다. 사람들이 모이면 일이 된다. 그래서 플랫폼이 중요하다. 공간을 한 번 만들면 고정비를 감당하기 어려워도, 그 공간이 사람들에게 주는 힘 같은 것이 있다. 갈다와 과학과사람들을 중심으로 앞으로 더 많은 협력사업들이 쏟아져 나올 게다. 우리 걸스로봇도 공간을 꿈꾼다. 강연료와 장학금과 취재비용은 아끼지 않으면서, 임대료가 아까웠다. 출퇴근도 없었다. 그러나 요즘 부쩍 고정된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맹렬한 후회가 든다. 이공계 괴짜면서, 여성이면서, 페미이기까지 한 희박한 확률들이 겹친 우리가 누군지, 서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을 확대하고 도모할지, 만나서 부대끼며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다시 제주는 어떤가. 시골 우리집에는 갈다처럼 공사 일정 차질로 3년째 밖에 세워둔 자동 천문대(아스트로보이)가 있다. 2층 주택에 사설 천문대와 메이커 스페이스를 만들어 개방할 생각이었는데 개점도 못하고 휴업 상태다. 노형동에는 방 두 개에 2중 레일을 걸어 책장을 짜 들여놓은 꽤 근사한 아파트가 있다. 그 공간들은 어떨까? 강연도 듣고, 밥도 먹고, 잠도 자는 이 재미있는 일들은 나 혼자 못한다. '과학 불모지' 제주에서, 지난해 오준호 KAIST 교수님과 과학기술계 어벤저스들을 불러모아 벌였던 '개기일식 클래스&살롱'에는 홍보도 없이 하루 만에 300명이 모였다. 폭풍우를 뚫고도 그들은 왔다. 그러니 분명히 시장은 있다. 과학대중화 운동과 살롱을 함께 할 사람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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