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범도민위령제가 열린 3일 제주시 봉개동 평화공원 부지는 그 동안 가슴에만 담아놓을 수밖에 없었던 유족들의 한 맺힌 사연들로 가득했다.

 희생자의 위패가 모셔진 제단 앞에는 조화가 놓여졌다. 많은 조화 속에서 4·3 특별법을 공포한 대통령이나 4·3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위령제 현장에서는 대부분의 4·3 중앙위원회 소속 위원들도 만날 수 없었다.

 희생자의 위패는 모두 컴퓨터로 출력돼 높다랗게 솟은 제단 전면을 가득 채웠다. 술 한잔, 절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높은 제단 앞에서 유족들은 쓸쓸히 부모형제의 이름을 확인하고 차마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손수 제물을 준비해 온 여든 줄의 한 노인은 제단 한켠에서 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그 뒤로 ‘초석이라도 깔아시믄 절이라도 한번 할건데’라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사회자는 위령제를 찾은 각급 기관단체장의 헌화와 분향이 시작되지 않았다며 유족들에게 질서를 지켜달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위령제를 찾은 단체장들은 헌화가 끝난 후 서둘러 위령제 현장을 떠났다.

 눈이 어두워 위패에 적힌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한 할머니는 남편의 이름을 찾아달라며 기자의 손을 끌어 당겼다.

 반세기가 흘러도 슬픔은 여전했다. 유족들에게 슬픔은 정연한 질서를 앞세운 이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슬픔과 한은 지극히 구체적인 하나의 사실일 뿐이었다.<문화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