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오르막길은 언제나 힘겹다. 동네 주변을 걷다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다. 할머니 한 분도 나와 함께 잠시 쉬다가 발걸음 뗀다. 뒤따르던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어드레 감수과?" 할머니는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보다가 눈만 껌뻑인다. "곱게 촐련 어드레 감수과?" 그제서야 말을 알아들었는지 "손지 온댄 허연 가 봠서"라고 화답한다. 손주가 오는지 할머니는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손주를 기다리는 마음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느껴본지 오래다. 요즘은 택배 말고는 기다리는 게 별로 없다. 아, 그러고 보니 병원 진단결과를 기다리기도 한다. 어려서는 늘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밭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고, 학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국군 장병 아저씨의 편지를 기다리곤 했다. 시장 가신 할머니의 검은 봉지를 애타게 기다린 적도 있다. 할머니의 검은 봉지 안에는 호떡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고,오일장제 운동화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의 설렘과 기대감을 이젠 더 이상 맛볼 수 없다. 할머니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이젠 호떡이나 운동화 같은 게 기다려지는 시절도 아니다.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영화 <집으로>(2002)는 기다림에 대한 영화다. 아니, 그리움에 대한 영화일 수 있겠다. 영화 속 아이 상우(유승호 역)는 이혼한 엄마의 생활난으로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상우 나이는 7세, 할머니 나이는 77세다. 할머니는 산골 오지에 홀로 사신다. 상우는 화장실이 마당 뒤편에 있는 할머니집이 싫고,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할머니가 영 못마땅하다. 대신 게임을 실컷 하고 싶고 치킨을 먹고 싶다. 상우는 할머니에 대한 불만을 보란 듯이 토해낸다. 할머니의 은비녀를 훔쳐 밧데리를 사러가고, 바느질 하는 할머니 옆에서 신나게 롤러블레이드를 탄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아무런 말씀이 없다. 손자가 마냥 애처롭고 귀엽기만 한 것이다. 상우는 손빗발짓 다해가면서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한다. 할머니는 겨우 알아들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비를 맞으며 시장에 가서 닭 한 마리를 사오더니, 치킨이 아닌 백숙을 끓여온 것이다.  

영화는 개구쟁이 상우와 문맹인 할머니와의 진심어린 소통과 화해로 결말이 난다. 할머니를 늘 괴롭히던 상우는 서서히 할머니의 정성어린 보살핌에 마음이 동하고 할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할머니와 헤어짐이 다가오면서 상우는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친다. 상우가 할머니에게 가르쳐준 글자는 "아프다", "보고 싶다"이다. 끝내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할머니, 많이 아프면 쓰지 말고 보내. 그런 내가 할머니인줄 알고 달려올게." 라며 그림엽서 한 장을 내민다. 그림엽서에는 "보고 십다"라고 적혀 있다. 아직 일곱 살인 상우답게 받침도 틀렸다. 

상우는 애타게 기다리던 엄마가 와서 다시 도시로 간다. 할머니는 상우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다시 고갯길을 걸어 집으로 간다. 할머니도, 상우도 모두 집으로 간다. 그 이후 상우는 어떻게 됐을까? 또 할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잘 모른다. 상우도, 할머니도 자신의 인생을 느리게 혹은 정신없이 걸어가고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개가 울리고 종이 들리고/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오오 인생이여(김수영「봄밤」 일부)

오르막길을 오르던 할머니는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나는 다시 골목을 돌아 내려오다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한낮인데도 술 취한 사람이 골목 어귀에 널브러져 있다. 한없이 풀러진 한 생이 잠시 쉬어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본다. 어쩌면 너무 서두르다 제풀에 꺾인 건 아닐는지. 말이 쉽지 서두름을 절제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방에서 물질의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판과 이미지들과 소리, 소리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고 방금 되 뇌이던 사람도 다시 새로운 욕망들로 술렁이기 십상이다. 끊임없는 경쟁 심리는 '새로움'과 '변화'라는 시대의 키워드가 과잉 주입되는 것의 결과가 아닐까. 새로워져야 한다고, 변화해야한다는 주장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새로워서 좋은 게 있고, 묵은 것이어서 좋은 게 있을 텐데 지금의 시대는 '새로움'의 가치만 강조되고 있다.그래서 '빨리빨리'를 종용한다. 

조금 느리더라도 걸어서 가자. 때로는 물웅덩이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유도 부리면서. 누군가의 발자국 아래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잃어버린 그(그녀)가 보이지 않는가. 그가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개가 짖고 종이 울리는 소리 들리는가? 서두르지 말자.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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