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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바람과 빈집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강정실
입력 2018-06-24 (일) 13:34:47 | 승인 2018-06-24 (일) 13:36:21 | 최종수정 2018-06-25 (일) 11:20:51

망망한 바다 품에 안겨 있는 곳, 태곳적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악천후 때마다 발이 묶이는 제주도 북쪽 섬 추자도를 찾았다. 4월 하순 일요일 거리에는 사람들이 안 보인다. 추자항 터미널 부근 주변 상가는 추자도에서 제일 번화할진대, 영화 촬영세트장처럼 한가하기만 하다. 참조기가 많이 잡힐 때는 육천여 명의 도민이었으나, 현재는 천팔백여 명밖에 안 된다. 이 탓에 도민이 줄면서 지역 문화기반과 상업지로서의 매력이 떨어지자 에둘러 관광지로 탈바꿈하는 섬이다. 

동편 바다를 찾았다. 눈앞 바윗덩이들은 자라등처럼 부표(浮漂)로 떠있고, 이리저리 깎이고 닳아진 바위들은 조각가의 작품 같다. 바위를 향해 달려드는 거친 파도와 바닷바람은 생명의 원초적 음향인양 으르렁대며 포효한다. 수평선으로부터 떠밀려 오는 속세의 번뇌는 온갖 상념들의 물결이 눈앞에서 일렁인다. 세파에 찌든 오장육부를 열어놓고 해조음을 탐색하는 나는, 소라껍질이 되고 두 눈은 묘망한 바다를 더듬는다. 인생사는 새옹지마라 길흉화복의 희비가 굽이굽이 부침하는 것 같다. 

추자교 위다. 강한 바람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이름 그대로 바람을 허락하는 섬이다. 해변도로를 따라 걷는다. 풀숲의 소슬길로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이 있어 그 길을 선택한다. 언덕 너머 넓은 길섶에 빈집이 있다. 처마 밑 제비당반에는 제비 한 쌍이 앉아 있다. 올해 처음 보는 제비다. 가까이 다가가자 씽하니 하늘로 날아올라 집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회상(回翔)한다. 담벼락에는 우물이 있고 분꽃과 봉선화가 연초록빛 목울대를 내밀고 있다. 우물 뚜껑을 열었다. 우물에 비친 하늘은 청담빛 추억이 서린 물이다. 건너편 비탈밭 모서리에는 비석 없는 무덤 하나가 덩그맣게 자리하고 있다. 누굴 기다리기 위해 이렇게 홀로 긴 시간을 누워 있나. 그래도 철 따라 변하는 자연을 보며 반짝이는 별빛과 이슬, 절써덕거리는 파도 소리, 때에 따라 바람이 불어오는 따뜻한 남녘이라 외롭지 않겠다 싶다.

고시조가 생각난다. 

/ 꽃이 진다한들 바람을 탓할쑈나 / 가는 님 붙잡지 못할 내 아니건만 / 녹양이 천만산들 가는 춘풍 어이하리 /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불가사의한 사후세계는 우리 인간의 두뇌로 이해할 수 없기에 영원성과 묘법(妙法)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집 마당에는 마른 잡풀과 흙먼지가 바람의 흐름에 여러 켜를 만들어 놓았다.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이따금 부엌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 온다. 마루 벽에는 노인이 화롯가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림이 붙어 있다.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 그림, 힘겨운 현실에 침묵하는 것 같다. 한때 이곳은 가족간 생기가 넘쳐나고 사랑과 행복을 만드는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인간이 가지고 있던 허욕이 다 빠져나간 듯, 세상에 존재할 가치조차 무의미하다 싶을 정도로 허허롭게 변해있다.

석양이 잦아드는 해변도로를 따라 민박집에 되돌아왔다. 아내는 뱃멀미 탓인지 잠들어 있다.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본다. 처녀 때, 나와 인연을 싹 틔울 당시는 상기된 봄의 해맑은 얼굴이었고, 아기 둘 낳고는 육아까지 도맡은 스파르타 전사의 얼굴이었다. 지금은 젊었을 때의 이름표만 파리하게 남아 있고 두 눈 밑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무표정의 얼굴은 평화가 보이지 않는다. 다 내 탓이다. 나는 늘 위선적이었다. 무언가 숨기고 싶었고 돌아서면 후회했다. 지금도 내 안에는 늘 방랑의 분노가 똬리를 틀고 앉아 나를, 늘 피 흘리고 아프게 한다.

돌아오는 여객선 선상에 올랐다. 이때는 동행과 함께이면서 온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이다. 세찬 바람은 파도를 은색으로, 금색으로 뒤척이게 한다. 하늘에 있는 흰 구름도 서쪽으로 훠이훠이 흘러가고 배는 낡은 청바지색 바다를 가르며 흰 물꼬리를 길게 그려놓는다.

강정실  webmaster@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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