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논설위원

어제는 6·25전쟁 발발 6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6·25전쟁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뚜렷한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후세대에 남긴 대사건이다. 전쟁은 국제적인 냉전과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켰으며, 동시에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놓았다. 전쟁은 수행 주체인 국가·군대의 공적인 영역과는 달리 후방에 있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죽음, 기아, 이산, 동원, 갈등의 공포를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적으로 생각하고 체험하게 하였다.

전쟁은 전방에서부터 후방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의 인간과 사회에 층위를 달리하는 영향을 미쳤고 변화를 가져왔다. 최후방으로 여겨진 제주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주도에는 4·3사건이 아직도 종료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제주도는 전쟁 이전부터 극단적인 공포와 굶주림, 격분, 좌절, 체념 등의 집단적 일상성과 정서가 사회와 인간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은 아니었지만, 주민들은 4·3의 '내전'에 이어서 연속된 전쟁을 겪었다. 예비검속과 형무소 재소자 집단학살(죽음의 일상화), 잔여 유격대 토벌과 방위 조직 동원(내전의 연속과 동원의 일상화), 피난민의 입도에 따른 식량난의 가중(배고픔의 일상화), 피난민(외래민)과의 갈등(갈등의 일상화), 레드콤플렉스 극복을 위한 참전 등 작은 전쟁을 섬 내부에서 벌이고 있었다.

전쟁은 제주지역민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기회에 참여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역공동체 생존을 위한 삶의 방식이었다. 4·3에 이은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제주도민들은 권위주의적 반공국가체제 하에서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의식과 함께 국가의 물리력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제주도민들은 4·3의 피해의식을 간직한 채 반공의 선봉임을 자처하며 국가체제에 서서히 순응하여 갔다.

이렇듯 세계적 냉전지대의 주변부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은 반도의 또한 변방인 제주섬 주민들의 생활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냉전과 분단의 상처는 4·3과 6·25를 거치면서 더욱 깊어갔다. 그러기에 냉전, 분단, 4·3, 6·25는 제주민들에게는 풀어내야 할 과거사이며, 극복되어야 할 역사 용어이다.

4·3 당시 국가 공권력의 집단 살상과 민간인들의 대응 폭력 모두 섬 주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4·3의 해결 구호인 '화해와 상생'은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제주도민들에게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김일성이 6·25전쟁을 "남한 인민들의 해방을 위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하여 무력 침공을 미화하였지만, 남측의 반격과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의 국제적 개입을 가져온 원인 제공에 불과했다. 서울 수복 후 제기된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 또한 미국의 힘을 등에 업은 군사력 우위의 무력통일론이었다.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도달하였지만 결국 군사력에 의지한 통일은 달성되지 못하였다. 6·25전쟁 과정에서 한반도에서는 통일을 명분으로 한 무력전쟁은 용인될 수 없다는 교훈을 새기게 되었다.

6·25전쟁은 그 내상의 정도를 넘어선 분단의 고착화를 70년 가까이 이끌어 온 역사적 동인이 되어버렸다. 전쟁이 만들어 놓은 독재정치의 일상화, 주민들의 경제적, 문화적 이질화 등은 남북을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최근 4·27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5·26 정상 간 재회, 6·12 북미정상회담 등 일련의 냉전과 분단의 해소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 시기 힘을 통한 무력 경쟁에서 선의의 경제 문화 협력과 자주 평화, 공동 안보를 중시하는 상호 체제 인정의 단계를 밟아나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적했던 '지난 과거를 묻고, 새 출발을 하자'는 선언에는 6·25전쟁과 이후 상호 대립의 현대사에 대한 회고와 반성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인다.

향후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의 체결 등이 진전되길 진정 기대해 본다. 또한 6·25전쟁에 앞서 냉전과 분단이 빚어낸 4·3 비극의 섬, 한반도 남단 제주도로부터 남북화해 평화정착의 기운이 움터나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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