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사꾸라' 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유진산(柳珍山)은 선이 굵은 정치인으로 통한다.적어도 진퇴(進退)문제에 있어서만은 그랬다.

 6-70년대 야당의 실력자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두차례에 걸친 정치파동의 주역이기도 했다.야당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른바 '진산 파동'의 장본인이다.

 “왜 퇴장했어 이 사꾸라들아 ”

 64년 한여름의 어느날 국회의사당 민정당의원총회장은 일단의 무리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국회언론윤리법 통과를 둘러싸고 특정정파간 모종의 흑막이 있었다고 유진산의원측을 몰아 세우면서다.이날의 난장판은 정치적 라이벌 관계인 윤보선전대통령이 유의원 제명을 고집,결국 제명된다.그는 '당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당을 떠난다.

 2차 '진산파동'은 그가 신민당 당수 시절인 71년 8대국회의원 선거를 전후해 터졌다.유당수가 자신의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등록마감 전날 갑자기 전국구로 돌아선 것이 발단이었다.유당수가 포기한 지역구는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인척인 공화당의 장덕진후보였기에 당내외로부터 의혹과 저항을 받았다.야당의석 한석이 아쉬운 판에 당선이 유력한 지역구를 포기한 것은 이적행위이며,물밑거래가 있었지 않았느냐는 추측들이었다.궁지에 몰린 유당수는 '선거는 당수가 주도해야하고,그러자면 자금도 책임져야 한다'는 말과 함께,사태의 모든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공언했다.그러나 그의 공언은 선거결과 야당인 신민당이 1·1%의 역사적 승리를 거두면서 없었던 일이 된다.

 오늘날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이 16대총선 후보 공천파동에 휘말려 휘청대고 있다. 공천에서 소외된 이른바 '정치 난민'들이 일단의 전선을 이뤄 신당창당에 나서면서다.당 일각에서는 과거 '진산 파동'의 사례를 들어가며 이회창총재 인책론마저 제기되고 있다.역시 궁지에 몰린 이총재가 책임을 통감한다며 진화에 나서고 있다.선거후 전당대회를 열어 신임을 물을 것임을 천명하고,한편으로는 과거 당총재로 모셨던(?) 김영삼전대통령을 방문 고개 숙여 도움을 간청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과거지사가 반면교사라고는 하나,그 스스로가 양산한 '공천난민'들의 병풍 앞에 아나가 읍소하고 있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쪽'같아 보이지는 않는다.차라리 초지일관 '개혁공천을 위한 역사적 선택이었다'고 소신을 지킴만 못하다는 생각이다.<고홍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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