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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게메마씀"고훈식 제주어보전육성위원·논설위원
고훈식
입력 2018-07-15 (일) 13:58:01 | 승인 2018-07-15 (일) 17:00:16 | 최종수정 2018-07-19 (일) 11:30:25

'비 오는데 수박 팔러 다니네'라고 말을 건넸을 때 청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가 소통의 관건이다. 

화자의 입장에선 비오면 수박이 팔리겠느냐는 의문에 비 오는 날에도 수박을 팔아야 하는 신세가 딱하다는 동정심인가, 비가 오는 날이지만 수박을 팔지 않으면 밭에서 그냥 썩고 만다는 낭패감 때문일까.

여름 농사를 위하여 흘린 땀이 수포로 돌아가는 지경이므로 어리석다할지라도 차선책이 없다는 절박감에 한 통에 만원 하는 거 3000원에라도 판다고 소형 확성기로 마을 골목을 돌아다니는 상황이야말로 비오는 날에도 제비 새끼들은 배고프다고 지랄 같이 샛노란 주둥이를 쩍쩍 벌리고 아우성을 치면 몸 둘 바를 모르는 어미 제비부부는 할 수 없이 비를 맞으면서도 풀덤불 속에 숨어 있는 벌레를 잡으려고 저공비행으로 진땀을 흘린다. 잠시 쉬느라고 전신주 꼭대기나 전깃줄에 앉아서 비를 맞으면서 숨을 고르는 신세가 비오는 날 수박을 팔러 다니는 농부와 닮았다.

이토록 다양한 저의가 있음에도 단순히 "오죽해야 고래장 같은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수박을 팔러 다니겠느냐"는 핀잔이 말대답인 경우 화자의 입장은 기분이 꽝으로 전환한다. 

비가 오는데도 수박 팔러 다닌다는 말을 어리석다는 의미로 해석하고는 오죽하면 그러겠느냐고 전제하고는 내 남편이지만 몰인정하면 되느냐고 하면 "그거 몰라서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다"고 다시 맞받아치게 되는 순간부터 불통의 벽이 두꺼워진다. 

마침 둘이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TV 시청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는 둘 만의 공간이라서 평화로운 풍경이 급물살을 타면서 감미로운 강물이 범람하면 좋겠는데 각시 닮은 애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군기를 잡으려고 너도 저렇게 부지런히 일을 하라고 윽박지름을 감춘 술수이고 애인 닮은 각시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비가 와도 수박은 수박이니까 10통을 사서 차에 싣고 드라이브 겸 가까운 친척집과 친구 집에 나누어 주고 돌아오는 길에 검은도새기 궤기 정식을 먹고 해안가 카페에 들러서 차를 마시면서 물결소리와 빗소리에 유년의 자장가를 떠올리고 정담을 나누자고 제안을 하겠지만 평생 고생만 시켰으니 그나마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이라도 해줬으니 고맙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앞으로는 더욱 당신을 아껴주겠다고 미소를 던져야 아내의 트라우마를 달랠 수 있었던 상황이다.

서로 정서가 잘 통하는 경우라면 가장으로서 체면을 잠시 접고 비 오는데 수박 팔러 다닌다고 말을 걸었을 때 그냥 귓등으로 흘러들어도 좋은 대답이고 제주도민이 즐겨 쓰는 '게메마씀'으로 분위기에 동조하면서 "싸게 파는 거니까 우리도 두 개 사주게 마씸"이라고 상호조약을 채결하던가,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다고 했으면 그냥 넘어갈 일임에도 너는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 했다고 남이 비오는 날에도 수박을 파는 고생도 하고 있는데 게을러 터져서 남의 등으로 편안하게 살아오지 않느냐고 말꼬리를 붙자고 흔들면 소통은 없다.

지금까지는 집안의 가장은 남자들이고 대기업의 대표도 남자들이다. 검게 빛나는 선글라스만 안 썼지 얼마나 늠름하고 위엄있는 모습인지 경호원이 따로 없다. 과묵하다는 지적이다. 육지 여자가 제주도 남자와 사귀면서 한라산 횡단도로 숲 터널을 지날 때 감동이 넘쳐서 "낭만이 있네요" 했을 때 "풀도 하영 잇"'라고 대답하고 싶어도 고개만 끄덕이는 모습은 가정을 지키려는 사명감과 기업을 발전시키려는 긴장감이 남자의 매력이라는 자부심에 함부로 말 걸기 어려운 표정을 짓게 만든 거다. 

이제 깨우쳤으니 내년 여름에는 비 오는 날에 수박을 팔러 다니는 확성기 소리를 들으면 남이야 수박을 팔든 말든 공연한 말로 서로 기분 나쁠 필요 있냐는 순발력으로 꼭 해야 할 말이 아니면 침묵이 금이라고 다짐하면서 슬그머니 방으로 피해야겠다. 

고훈식  webmaster@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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