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논설위원

성공한 여자만 여학생들의 멘토가 될 수 있을까. ‘지정성별(외성기 모양에 기반해 태어날 때 법률문서 등에 기록된 성별)’만 여성이면, 젠더문제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청년 여성 멘토링’이라는 사업이 있다. 여성부 산하 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하 양평원)이 주관한다. 양평원은 매년 30여 명의 멘토들을 모으고, 멘토 한 사람에게 10여 명의 여대생 멘티들을 배정한다. 지난달 첫 상견례에서, 신임 원장 나임윤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멘토들에게 당부했다. 이론과 현실을 오가며 직접 여성학을 하는 이라 가능한 통찰이었다.

“사실 우리 나이든 여자 선배들은 20, 30대 여성들에게 절대 롤모델이 되지 못합니다. 밀레니얼 여성들은 언니들처럼 밤새워 죽도록 일해 성공하고, 남자처럼 경쟁하다 스스로를 잃는 데 더 이상 공감하지 못합니다. 이미 성공한 여성들은 기득권에 줄 선 사람들로 보입니다. 주니어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 안 통할 겁니다. 스스로를 성찰하며, 여성 혐오의 타겟이 된 20, 30대 여성들과 함께 해줘야 합니다.”

올해 멘티들이 참여한 첫 활동은, <걸스로봇>이 한국플랜트산업협회, 한국신재생에너지협회,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 한국로봇산업협회 등 네 개 신산업 분야의 인적자원 개발 SC(Sector Council)와 함께 벌인, 이공계 여대생 해외 취창업 특강 <Dive into Diversity>였다. 기존 문법에 따라 성공한 여성들, 남성보다 더한 남성성을 장착한 이른바 ‘명예남성’을 멘토로 세우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스타일로 새 세상을 만드는 30, 40대 멘토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자리였다. 요새 젊은 여성들은 명예남성을 아예 ‘흉자(흉내자지)’라고 부르며 경멸한단다.

해외 진출은 걸스로봇 초기부터 핵심 테마였다. 이공계를 전공하는, 또는 이공계 진출을 희망하는 젊은 여성들이 영어와 기술을 익히면 어디로든 가서 잘 살 수 있다고 필자는 믿었다.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은 옛날 얘기고, 이제는 기업을 쥐어짜도 일자리가 나오지 않는다. 제한된 자리를 두고 밀레니얼들은 혈투를 벌인다. 일자리란 20대 이후의 전 인생을,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상상력의 원천인 까닭이다. 그러니 나가라.

공통의 이야기를 여성들에게 더 크게 말하는 건, 다른 모든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격변기에는 다양해져야 산다”는 명제 때문이다. 남성 중심적 문화의 한계는 각 분야에서 명백해졌다. SC 입장에선 당위는 있지만 실천 방식이 화두였다. 다양성의 한 핵심인 여성들에게는 그동안 스테레오 타입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허락되지 않아왔다. 여성의 모험은 여전히 금기시된다. 플랜트, 에너지, 의료기기, 로봇 같은 핵심 산업 첨단 분야에서 나서준 건 대단한 일이다.

우리가 찾은 롤모델들은 크게 성공한 이들은 아니었다. 다만, 외고 나와 프랑스 미대에 가고, 미대 나와 시추선에서 일했다. 인문대 나와 신재생에너지 하드웨어 스타트업 차리고, 공무원 때려치우고 의료기기 스타트업 가고, 미국 대신 일본으로 유학가 자율주행차를 만든다. 평균보다 좀 더 용감하게 지평을 넓혀가는 이들이었다. 국내외 60여개 학교에서 200명이 넘는 학생들로부터 신청이 쇄도했다. 미국 퍼듀대와 조지아텍, 뉴욕주립대, 홍콩중문대에서도 왔다.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 서울예대, 한국외대 같은 예술계, 인문계에서도 참여했다. 성 역할과 전공과 국경을 넘나드는 사례가 단 한 건이라도 보이면, 뒤에 오는 이들은 자연히 용기를 낸다. 꼰대질이 필요한 건 꼰대 자신에게다. 더 나서지 마시라. 노추일 뿐.

한 가지 더. 멘티들 중 현장 스태프로 자원한 이는 넷이었다. 시간당 1만원에 점심, 저녁 식대로 각 1만원씩을 얹었다. 속기를 맡은 친구들에게는 3만원을 더 보탰다. 당사자들을 착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재능기부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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