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논설위원

소 하면 이중섭을 떠올릴 정도로 소는 이중섭의 중심적인 모티프로 알려져 있다. 산업사회 이전 농경사회에서 소는 우리 인간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소 팔아”라는 우리말이 있듯이 소는 농경사회에선 재산 목록의 첫 자리를 차지했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기 위해 소를 팔았다.

오늘날처럼 기계화되지 않았을 때 가장 힘든 농사일은 소의 몫이었다. 그런 만큼 농가에선 더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근·현대 미술작품 속엔 소가 빈번히 등장했다.

이중섭의 초기 작품에서 56년 작고하기까지 그가 가장 많이 그린 것도 소였다. 30년대 후반 일본의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해 수상한 작품 가운데도 단연 소가 중심을 차지했다. 원작은 남아 있지 않고 엽서나 미술잡지에 게재된 인쇄물로만 남아있는 41년의 <소와 소녀>, 43년의 <망월>은 인간과 소가 어울리는 목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상향을 꿈꾸는 작가의 염원을 초현실적 분위기로 담아낸 것이다. 그러한 소가 해방 이후 동족상잔을 거치면서 크게 변화한다. 꿈을 꾸던 상황은 격렬한 투쟁의 장으로 바뀌면서 소는 환상 속의 대상이 아닌 현실의 대립 상징으로 변모된다. 한묵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제 때 그가 그린 소(그때 소는 목가적이다)와는 달리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두 동강이가 난 이후의 소는 소 두 마리가 대가리를 서로 맞대고 으르렁대는 투우였다. 6.25동란으로 1.4후퇴 때 가족들과 헤어져 38이남으로 흘러내려온 이후의 소는 절망적 갈등 속에서 몸부림치는 분노의 소로 변한 것이다”

이중섭의 소는 단순한 대상이기보다는 목가적이거나 투쟁적이거나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서사적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 흰소(홍대박물관 소장, 삼성리움 소장, 서울미술관 소장)는 흰옷 입은 우리민족 -백의민족- 을 상징한 것이다. 소의 우는 모습과 슬퍼하는 모습은 우리 민족의 슬픈 상황과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의인화한 것이다.

민족적 서사에서 자전적 요소로

현재 이중섭미술관의 <소, 사랑하는 모든 것>전에는 이중섭의 대표적인 소 그림과 제주 미술가들의 소를 테마로 한 작품들이 걸려있다. 이중섭의 엽서그림 <소와 여인>은 초기의 목가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소>는 소의 해부학적 구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와 새와 게>는 이중섭 작품 가운데 가장 해학성이 짙은 작품이자 그의 주제의 전환을 은유적으로 표상한 작품이다. 옐로워커 바탕에 연필 선으로 단숨에 그려나간, 이중섭의 드로잉이 지닌 힘과 리드미컬한 필세를 대표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가 바닥에 누울 태세를 취하고 있는 순간 뒷다리 사이로 파고든 게란 놈이 집게발로 소의 불알을 무는 장면이다. 놀란 소의 튀어나올 것 같은 눈방울과 정신없이 휘두르는 고사리 줄기 같은 꼬리는 얼마나 놀라고 아팠을까를 실감나게 한다. 소뿔에 앉아있는 새란 놈은 너같이 등치 큰 놈이 게 집게발에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느냐고 핀잔주는 표정이다.

어쨌거나 이 장면은 게에게 굴복당하는 소의 모습이다. 게에게 주제의 자리를 내어주는 전환적 상황을 극적으로 표상해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조만간 게와 물고기와 아이들이 중심이 된 자전적 요소가 소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 서사를 대신해 그의 후반(서귀포 시대 이후)을 장식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미술가들에 의한 소 작품은 소라는 테마를 통해 시대를 달리하는 작가들의 의식이 반영되고 있어 흥미롭다. 이들에게 소는 거대한 민족적 서사나 자신의 불행을 은유하는 매개체라기보다 인간과 어우러져 사는 행복한 시대의 염원이 짙게 담겨 있는 대상이다. 어쩌면 범신론인 대상 즉 내가 소가 되고 소가 내가 되는 그런 낙원의 상황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행복하고 부유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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