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옥주 블루클럽서귀포점

언제부터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TV에서 '팩트 폭력'이 유행하고 있다. 숨기고 싶은 개인적인 사실, 즉 팩트를 무차별적으로 공개해버린다는 말이다. 당한 사람은 멋쩍은 표정으로 그 상황을 넘어가려고 하지만, 옆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그런 장면을 보면 즐겁기보다는 쓴 웃음이 나올 때가 많다.

새 정부가 들어서며 적폐청산을 외치자 너도나도 폭로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이 사회의 악습들을 들어내기 위한 순기능도 크다고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서 너그러움을 찾기가 힘들다. 언론은 당사자에게 소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마구 퍼트리고, 기다림과 관용이 사라진 각박한 시대에 한 정치인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아파트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이 발생하기도 하고, 잘못한 직원에게 물컵을 던진 기업주는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한마디로 배려와 용서가 사라져 가는 세상이다.

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이웃의 잘못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며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용서의 목적은 결국 내 자신이 용서받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공자 역시 자신의 일관된 도(道)를 '충서(忠恕)'라고 가르친다. 용서의 서(恕)자를 들여다보면 같은(如) 마음(心)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 나 역시 같은 죄를 지을 수도 있었다는 겸허한 생각이 용서로 이어진다는 뜻이리라. 어린 시절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주시던 우리의 부모은 자식의 앞길을 걱정했을 뿐 잘못에 대해서는 미리 용서의 마음을 가지셨던 것 같다.

믿는다는 영어 단어 'believe'에는 거짓말을 뜻하는 'lie' 숨어 있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믿어 주는 것…그건 부모님의 사랑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용서받으며 자라왔고. 너그러움을 배우지 않았던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제보다 더 바쁜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분주한 삶 속에 내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찬 우리들인데 타인의 잘못 그것도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일까지 들추어내 비난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용서의 마음이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진정한 베풂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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