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온천 주인에게 전화했다. 주인은 "평일이라 내일 온천에 갈 텐데 혼자라도 괜찮겠냐"고 되묻는다. 컵라면 몇 개와 낚싯대까지 자동차에 실었다. 그동안 애면글면 발행한 문단의 여름호를 국내와 해외 우송까지 완결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서다. 

엘에이(LA)에서 북쪽 프리웨이를 타고 두 시간 정도 운전하면 엔젤레스국유림을 지나 세쿼이아 국유림이 나온다. 대단위 귤밭을 지나 산꼭대기에 있는 이사벨라호수(Lake Isabella) 아래쪽, 컨강(Kern River)에 붙어 있는 노천온천에 가기 위해 가파른 계곡을 끼고 있는 산길을 따라 오른다. 가까이에서 보는 바위산은 참으로 장대하다. 비슷한 바위산이라 해도 등성이마다 다른 품격과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바위는 갈라진 틈새로 이끼와 작은 나무들로 빼곡하게 덮여있다. 바위틈에서 보여주는 생명력이 놀랍기만 하다.

바깥 정경을 보며 시공을 넘는 상상의 나래에 취해있는 사이 간판도 없는 목적지 입구에 도착했다. 경사 45도인 비탈길을 200여 미터 내려가면 강섶에 서너 대 주차할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주변에 있던 진돗개 세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온천 주인은 혹시 모를 산짐승의 접근을 막는 방법으로 이놈들을 풀어놓고 키우는데 사람을 무척 따르고 반긴다. 

강 건너에는 온천수가 흰 수증기를 뿜어내며 강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10여 미터 너비의 강을 주인의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나루터에 묶여 있는 빈 배에 오르자 개 한 마리도 동승한다. 온천장 입구까지 배에 이어져 있는 줄을 당기면 된다. 배로 이동하며 주변의 풍광과 동적인 분위기가 깊고 그윽하게 느껴진다. 벌써 유황냄새가 스멀스멀 콧속으로 들어온다. 깨어진 큰 바위틈으로 뜨거운 온천수가 흘러나오는데, 그 아래 앉아 있으면 바위가 쩍하고 깨어질까 봐 겁이 난다. 

이곳은 자연 그대로다. 국유림의 깊은 산 속이라 영업허가나 주택허가가 안 난다. 전기시설도 없고 손전화기조차 안 터진다. 15년 전 지금의 한국인 노부부가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한 사유지이며 화수분이다. 시설이라야 단순하다. 농촌에나 있을 법한 푸세식 화장실 한 칸과 옷을 갈아입도록 펼쳐 놓은 서너 채의 텐트뿐이다. 대부분 토요일과 일요일, 안면 있는 전화고객이 아름아름 찾아와 온천 사용료로 얼마씩 받는 게 전부다. 손님이 찾아오는 날은 노부부가 텐트에서 생활하며 탕 내 바닥과 주변을 청소한다. 그러나 손님이 없는 날은 이 화수분을 개 세 마리에 맡기고 주인도 생활터로 잠시 되돌아간다. 

탕 위에 떠 있는 나뭇잎을 뜰채로 대충 걷어냈다. 나 혼자라 수영복도 입지 않고 탕 안에 몸을 담그고 자연을 즐긴다. 가슴속에서부터 뜨거움이 차올라온다. 몇 차례 탕 안과 밖을 들랑거리다가 낚싯대를 들고 강가에 내려간다. 강에 비친 초록빛 나무 이파리와 파란 하늘은 눈부시다. 강물에 두 발을 담그고 낚싯대를 드리운 자리엔 살빛 물결이 일렁인다. 그 살빛 물결은 바닷가에서 발가벗고 뛰놀던 어릴 때의 내 모습, 긴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여 있는 지금의 나, 부서진 꿈과 자아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내 모습이 일고 있다.

해가 너웃너웃 서산으로 넘어간다. 노을이 빚어낸 각양각색의 산과 바위는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강을 따라 서 있는 저 늠름한 바위산들과 나무들, 큰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화수분도 노을에 붉게 물들어 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곧 어둠이 내릴 것이다. 가지고 온 물건을 챙긴 후 주인이 말한 곳에 몇 푼 놓고 나루터에 내려간다. 

나룻배에 올라 줄을 당기기 시작하자 물소리가 가까이에서 조잘댄다. 조잘대다 사라지는 소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사라짐에의 소리는 아쉽고 그리워질 것이다. 그리고는 언젠가 이 소리마저 아련한 추억 속에 묻히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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