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대신에 모기가 득세를 한다. 여름내 맥을 못 추던 모기들이 날이 선선해지면서 기운을 되찾은 것이다. 그래도 찌는 것 보다 낫다. '살만하다'는 말의 의미를 느낀다.

곡기를 채우는 일만이 사는 일은 아니다. 자연이 기운이 생기를 되찾아야만 사람도 기운이 생기는 법이다. 어찌 사람만이겠는가. 모기도 날래고, 꽃들도 고개를 들었으며, 개들도 거리를 활보하기에 수월해진 모양이다.

혓바닥 늘어뜨리고 온종일 나무 아래 늘어졌던 세탁소개가 동네 이 구석 저 구석을 휘젓고 다니다 동네 할머니 뒤꿈치를 핥는 걸 보고 "무시거 트더먹을 거 이시?"라며 한소리 하신다. 개도 눈치는 있어야 하는데.

날이 선선하니 마을 나들이하기에도 수월하다. 어쩌다 들른 마을에서 좋은 볼거리가 있으면 웬 횡재냐 싶다. 자연이 한 편의 시기는 해도 진짜 시를 만나면 더없이 반갑다. 교래 분교에 갔더니 시가 너풀거리고 있다. 빨랫줄에서 시들이 휘날린다. 시가 깃발 역할을 하고 있다. 멀리서 보아도 저게 뭔가 싶으니 말이다. 아니면 전봇대일 수도. 

전시된 시옷 한 벌 한 벌 조심스레 읽는다. 아직 물젖은 누군가의 시 한 벌, 바람이 잘 말려주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을 보탠다. 그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알아들어 펄럭펄럭 까치발을 들어올린다. 

누구의 뒷골목에서 목을 빼고 서 있나
고개 숙인 저녁이 터벅터벅 오르는 길
주머니 가볍던 날에 외등 가만 켜둔 채

백팔 계단 올라야 보이는 그의 가난
꼭대기 해진 창가 꼬물꼬물 시린 발로
초승이 먼저 내려와 불빛들을 깨운다

기다림은 언제나 뒷골목으로 온다
내가 한눈판 사이에도 새벽을 기다리는
꼿꼿한 자존심 하나 느낌표로 서 있다
                           -김진숙, 「전봇대」

누군가의 저녁, 가파른 골목길을 터벅터벅 무겁게 내딛는 발걸음을 떠올리게 하는 시이다. 초승달이 그의 어깨에 내려와 가만 손을 얹지만 기별이나 갈까. 들고양이처럼 마냥 골목을 헤집고 싶을 것이다.

때로는 뒷발질 해가면서 전봇대와 씨름이라도 한판 붙고 싶을 것이다. 분명 나동그라지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그런 객기가 그리운 법이다. 객기는 여행자의 몸짓이다. 아무 것도 매인 것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언어. 그게 객기(客氣)다. 

아버지는 객기 때문에 망했다고 어머니의 하소연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래 떠돌이병이 있는 사람인데 홀어머니 단아들이라는 숙명이 방안에서만 몸서리치게 한 것이라고. 술병을 마주하고 밤새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생전 마신 술을 다 합치면 저 바다가 되었을 것이라고.

어려서는 그렇게 듣기 싫더니 그렇게 깊은 은유가 숨어 있었다니 새삼스레 어머니의 삶이 배달해준 시어에 무릎이 꺾일 다름이다. 전봇대처럼 기다란 아버지의 몸이 어느 날 푹 하고 꺾이더니 이제 나에게 전율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객기를 놓아버린 것이다. 그러니 곡기도 필요 없게 되었고. 

후배 시인이 저 수레를 보더니 가져가고 싶단다. 책 수레로 쓰고 싶다고.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금세 수긍이 간다. 시인은 누구보다 책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남들이 하지 않은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시인이기에 읽어야 할 책도 많지만 버려야 할 책도 많은 법이다.

만권시서(萬卷詩書)니 옹서만권(擁書萬卷)이니 하는 말과 더불어 두보(杜甫, 712~770)의 시구에 인용되고 있는 다음 말은 한 사람이 평생 읽어야 하는 책의 양 혹은 부귀를 얻으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부귀는 반드시 애써 노력하는 데서 어렵게 얻는 것, 남자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은 읽어야 하느니 (부귀필종근고득 남아수독오거서(富貴必從勤苦得 男兒須讀五車書))
 -'제백학사모옥(題柏學士茅屋)'이란 시의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구절이다. 
 
'남자라면'이라는 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냥 '사람이라면'으로 이해하는 걸로 하자. 두보가 말하는 '부귀'는 지금 이 시대가 말하는 부귀는 아닐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가 되려면 정신의 힘을 갖추려면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은 읽어야 가능하다는 뜻이 아닐는지. 하기야 두보는 매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40대에 이르러서야 벼슬길에 올랐으니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이백은 젊은 시절 각지를 유랑하다가 42세에 장안으로 나와 현종(玄宗)을 섬기는 일을 하다 그마저도 싫증이 나 다시 유랑 생활에 들어갔다고 하니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 하는 두보와 이백, 이 두 사람의 다른 인생 여정은 참 이채로우면서 흥미롭다.

더불어 참 시인이 된다는 것, 참 공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만, 길을 걷든 책을 읽든 '왜' 라는 물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왜 나는 길을 걷는가, 왜 일을 하는가, 왜 공부를 하는가, 왜 시를 쓰는가. 왜 모종을 심는가. 왜 이런 물음을 하냐고 시옷들이 나의 이마에 와 부딪힌다.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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