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영삼 UNITAR 제주국제연수센터 소장·논설위원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북한 핵 문제로 야기된 안보 불안을 비롯해 성장률 둔화, 청년 실업, 미래 발전 동력 부족, 보호주의적 국제무역 환경, 그리고 과거사 청산 문제로 인한 외교적 난맥상 등 어느 것 하나 쉬이 해결될 것이 없다. 그 가운데 지친 국민들은 차분히 돌파구를 찾기보다 분노 또는 낙담하여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

오전 7시, 하노이의 어느 사거리로 가보자. 빽빽이 서 있던 출근 차량들이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자 일제히 출발한다. '부웅'하는 굉음이 미처 덜 깬 졸음을 말끔히 날려버린다. 16년 전 처음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무리를 이뤘던 자전거가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바뀌었을 뿐 피부로 느껴지는 생동감은 여전하다.

올해 들어 베트남의 경제 발전은 눈부시다. 지난 1986년 사회주의 정체와 개방주의 경제를 결합한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채택한 이래 연 성장률 6~7%를 유지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1억에 육박하는 인구, 높은 교육열, 기술 흡수력, 그리고 불가능한 것도 해냈다는 자긍심과 발전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있다. 국외 베트남 커뮤니티의 성장세도 국내 발전 못지않다. 이렇듯 베트남이 안팎으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 간의 경제협력 관계도 괄목할 만큼 진전했다. 아픈 과거사를 뒤로하고 지난 1992년 수교한 이후, 양국 간 수출입은 지난해 639억불에 달해 베트남은 이제 우리의 3대 무역상대국이 됐다. 우리 기업 6000여개가 베트남에 진출했고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누적 투자액은 577억불로 세계 1위에 올랐다. 한국 경제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해 온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모델로 한 V-KIST 설립 사업도 베트남에서 진행 중이다.

이 외에도 한국에서 다문화가정을 꾸린 베트남 여성이 6만명, 베트남을 찾는 한국인이 250만명에 이르렀으며, 베트남 내 한국 드라마 시청률, 한국 전자제품 및 화장품 판매증가율 등의 지표들이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최근에는 베트남 축구팀의 멋진 플레이가 '박항서 신드롬'을 낳았다. 한때 냉랭했던 양국의 관계가 눈 녹듯 풀리면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비약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벤치마킹해발전의 시동을 걸었고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이 질주하는 베트남의 발전상을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부족했던 그 무엇, 즉 플러스 알파가 있다.

첫째 베트남은 안보의 중요성을 수사가 아닌 실천으로 보여줬다. 옛 식민 지배국 프랑스를 상대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고 세계 최강 미국을 내쫓아 통일을 달성했다. 심지어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동남아 지역에 야욕을 드러내자 이에 맞서 물러서게 했다. 대국들은 독립과 주권을 자주적으로 쟁취한 베트남을 만만하게 볼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안보라는 국가적 선결 과제를 수행해 냄으로써 다른 정책적 목표도 추진할 수 있는 자신감과 여유를 얻었다.

둘째 베트남 국민은 냉철히 절제를 지킨다. 베트남군은 디엔비엔푸에서 승리를 거둔 후 밀림 속 마을에서 조용히 자축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적을 당당히 물리쳤지만 굴욕을 안기지는 않았다. 절제와 겸손의 미덕을 알았던 민족 지도자 호찌민의 뜻이었다. '베트남 국민들과 결혼했다'던 자신의 말대로 호찌민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가족을 남기지 않았지만 '호 아저씨'는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자리 잡았다. 온 국민이 그의 정신을 본받아 내공을 쌓고 있다.

셋째 베트남인들의 사고는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는 월남전에 맹호부대, 청룡부대를 파병했다. 피아간에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우리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논란도 분분하다. 그런데 베트남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옛일에 연연하다가 미래를 그르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근저에 있다. 이처럼 유연한 사고는 베트남 전쟁 후 미국과의 관계를 신속히 복구하고 소련이 사용하던 군항을 미국에 개방하는 근거가 됐다. 또 도이머이 정책을 처음 추진한 응우옌반린 공산당 서기장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한때 적국이었던 나라의 지도자를 꼽았다. '원대한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국가 건설을 추진한 정치적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이 과거의 적대를 잊은 것은 결코 아니다. 분노와 원한을 조용히 삭일 뿐 저항의 정신은 그들의 디엔에이(DNA)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활력을 잃어가는 한국 사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모멘텀이 필요하다. 이제는 거꾸로 우리가 베트남을 배울 차례다. 국가의 정책적 우선 순위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말이 아닌 실천으로 미래지향적인 대안들을 탐색하되 성과 도출에 조급해 하지 말자. 베트남의 가치를 나침반 삼아 장기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이행하자. 그리하여 하노이의 교차로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활기가 우리의 거리 곳곳에서도 다시 샘솟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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