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휴 전 초등학교장·논설위원

나무그늘에 뻗은 굵직한 칡넝쿨을 잡아당겼는데 그게 호랑이 꼬리였다. 늘어지게 자다가 깨어나 입을 쩍 벌린 호랑이, 깜짝 놀란 나무꾼은 화닥닥 나무 위로 올라갔다. 화가 잔뜩 난 호랑이가 나무 위로 자꾸 튀어오르자 엉겁결에 손을 놓은 나무꾼이 쿵 떨어졌는데, 글쎄 그게 하필이면 호랑이 등이 아닌가. 이번엔 호랑이가 놀라서 몸을 흔들어대니 나무꾼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호랑이를 꽉 껴안았다. 호랑이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무더운 여름날,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걸 본 농부가 내뱉는 한마디. "나는 평생 땀 흘려 일하는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 빈둥빈둥 놀면서 호랑이등을 타고 달리는가" 목숨을 걸고 호랑이 등에 매달려 있는 나무꾼의 절박한 심정을 농부가 어찌 헤아리겠는가. 나는 농부와 다르다고, 타인의 처지를 헤아려주며 살고 있노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장애인 학생을 '양심 없는 민폐 장애인'이라고 손가락질한 명문대 학생들이 있었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장애학생을 위해서 학교 측이 강의실을 옮기려 하자, 몇몇 학생이 "350m 떨어진 강의실은 너무 멀다"며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양심이 있으면 장애학생이 수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글이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단다. 지난해 학기 초의 일, 이해나 배려와는 너무 먼, 가슴 메마른 이야기다.

공감하면서 산다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나부터가 그렇다. 소소한 집안일을 아내가 다 해주는 덕에 편안하게 살고 있기에 그 고마움을 잘 알면서도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때로는 내가 참 이기적이고 얌체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지금까지 젖어온 타성(惰性)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명절 같은 때는 더 그렇다. 그래서 올해 추석을 지낸 다음 슬쩍 말해봤다.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있으니 설이나 추석 중 하나만 하고 하나는 줄이는 게 좋암직·다". 그러자 아내의 의젓한 대답이 돌아온다. "1년에 겨우 두 번인 명절, 지금까지 잘 해온 건디, 무사 갑자기 그런 말 햄쑤과". 나는 "아니 그냥 해본 소리라".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이제 슬슬 명절 하나 줄이기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모처럼 가족들이 모였는데 차례음식을 준비하느라 고생하는 게 정말 미안하니까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끼리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청하고 공감하는 그런 명절이 된다면 오죽 좋을까.

공감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가까운 사람끼리 더욱 필요할 것 같다. 언젠가 잠깐 소개는 했는데 서른다섯 살 총각과 마흔일곱 과부의 결혼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다. 바람쟁이 노총각이 열두 살 위 과부에게 장가를 간다니까 친구들이 걱정을 섞어 놀려댔다. "석 달, 여섯 달, 아니 1년쯤은 잘 지내겠지". 그런데 이 부부, 죽을 때까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잘 살았단다. 여자는 미인도, 요리솜씨가 좋은 것도, 교양미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남편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준 것. 바깥일에 시달리다가 돌아오는 남편을 활짝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남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눈을 반짝이며 들어줬다. 감탄해주고 함께 분개해주고 때로는 깔깔 웃어주기도 하면서. "그랬어요. 오 정말 멋져" "아니 그 사람 정말 너무했네요. 나도 화가 나요" "호호호, 아이구 정말 재밌어요.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말을 잘해요". 이런 아내에게 살살 녹아내린 이 남자, 언제나 "당신이 최고"라는 말로 아내를 행복하게 해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벤자민 디즈레일리(1804~1881·영국수상 2회 역임)와 메리 앤 루이스(애칭 마리안느, 1792~1872).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 마음에 새겨둬도 좋을 것 같다. 경청(傾聽)과 공감(共感)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본보기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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