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을미년 8월 20일에 경복궁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조선의 왕후가 살해당한 것이다. 양력으로 세어보면 1895년 10월 8일, 바로 오늘이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의 길목에 강하게 버티고 있던 왕비 민자영을 제거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새로 서울에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주위의 눈을 속였다. 육군 장성 출신이면서도 방에 틀어박혀 불경에 심취한 듯 위장했다. 왕실이 방심한 사이에 물밑에서는 작전명 여우사냥 계획이 주도면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이를 주도한 이들은 일본의 지배계급인 지식인들이었다. 다른 폭력배들을 동원한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 나서서 계획을 실행했다. 저들이 당시 조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조선 내부에서도 이 일에 협력하거나 멋모른 채 들러리 선 사람들도 있었다. 흥선대원군도 가마에 억지로 실려와 동원됐다지만 권좌에 다시 오를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새벽에 왕을 만난 일본공사는 궁에서 사라진 왕비를 폐서인하라고 강요했다. 그제야 사건의 진상을 눈치 챈 고종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신변도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대신들의 저항으로 서인에서 빈으로 승격시키도록 절충하는 정도였다. 

두 해가 지나서 1897년 상황이 조금 호전되자, 기울어가던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꿨고 황제의 나라를 자처했다. 황제로 등극한 이경은 민비로 불리던 아내를 황후로 추존해 명성황후로 만들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요새 표현대로 지못미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생전에 황후로서 영예를 누린 것은 아니었으니 명성황후의 호칭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당대에도 중립적인 칭호였다. 비빈으로 격하시킨 일인들의 얕잡아보는 심리가 담겨져 있는 칭호라는 해석으로 한동안 민비로 불리다가 명성황후로 다시 격상됐다. 

그러나 민자영은 살아 생전에 그리 좋은 권력자가 아니었다. 국모로서 자애로운 품성을 보여주지 못했고, 권력으로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만 했는데, 상대에게 표독스러운 보복을 자행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외척의 횡포에 시달리던 왕조에서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대원군 이하응은 스스로 며느리로 민씨 규수를 택했다. 보잘 것 없는 집안이니 권세를 탐할 인재도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희망사항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소수의 가솔들과 친지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왕비는 대원군과 권력을 놓고서 경쟁해 승리했다. 

당시 해외에서 서울로 들어와 활동하던 선교사와 부인들이 남긴 기록에는 사뭇 다른 왕후가 등장한다. 기품이 있고, 지혜로우며 판단력이 뛰어난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궁중의 의전이 몸에 밴 동양의 왕비는 저들에게 신비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설령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더라도 이를 드러내어 불편함을 이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갑신정변 와중에 크게 다친 그의 조카 민영익을 의료선교사 앨런이 치료하는 데 성공하자 왕실로부터 큰 신뢰를 받고 있는 터였다. 을미년부터 을유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오십년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했다. 그 때의 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줄곧 퍽이나 불편한 이웃나라가 된다.   

강정의 관함식에 일본 해군이 일장기와 더불어 욱일기를 게양하고 참여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침략의 제국주의 상징으로 독일 나치의 깃발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의 국기는 용납될 수 없는 만행이다. 뻔뻔한 깃발을 활용할 기회를 얻지 못하자 일본은 차라리 불참하기로 했다. 태풍이 지나가던 주말에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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