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 서복문화국제교류협회 주최·제주학회 주관 "서복과 동아시아 문화교류" 국제학술대회가 어제 서귀포 칼호텔에서 열렸다.<강정효 기자>
 서귀포시 서복문화국제교류협회(회장 김형탁) 주최·제주학회(회장 전경수)가 주관한 ‘서복과 동아시아의 문화교류’ 국제학술대회가 26일 서귀포 칼호텔에서 열렸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중국 진시황의 지시에 의해 동남동녀 수천인을 선발해 동해바다를 거쳐 일본까지 항해를 나섰다는 서복 관련 사실(史實)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양상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동아시아 고대 역사문화와 서복’‘서복의 도한(渡韓)·도일(渡日)과 동아시아 문화에의 영향’‘동아시아 민간전승과 서복’이라는 주제로 서복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발표됐다.

 다음은 주요 발표 내용.
△리영시안(李永先·중국 산동사회과학원 연구원) ‘서복은 평화의 사자(使者)다’
 서복은 제와 노나라의 성인, 현인들의 우수한 사상품성을 계승, 동쪽으로 한국, 일본으로 갔을 때 그것을 조선반도와 일본열도에 갖고 갔다. 한국에서 그는 진한을 개발, 건설했다. 일본인에게 벼를 심는 방법,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서복은 한국, 일본에 가서 이 두 나라의 사회발전을 추진하였고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윤명철(동국대 겸임교수) ‘서복의 해상활동에 대한 연구-항로를 중심으로’
 서복이 동쪽으로 건너간 출발항구는 교남의 랑야(琅邪)이다. 서복의 행위는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여 삼신산을 찾아 떠났다는 개인적인 목적이나 혹은 도교라는 종교라는 관점 외에 보다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북선단의 출항은 진 또는 진시황의 동방개척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를 중국적 시각에서 파악하고 중국 위주의 질서가 구축되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정수일(전 단국대 교수) ‘서복 도한고(渡韓考)’
 서복 일행의 도한(渡韓)은 역사적 사실로 추정할 수 있다. 도한 전후 한·중 상호교류나 내왕, 접촉과 이해는 도한의 성사를 가능케 한 역사적 배경으로 기능하였고, 삼신산이나 단주(亶洲)의 지정학적 비정은 일행의 행선지, 적어도 그 첫 목적지가 한반도임을 예시하고 있다. 서복 일행의 동도·도한은 환황해문화권 형성의 여명기에 있었던 일대 역사적 거사였다. 서복과 관련 방치되어 널려있는 현존 유물과 전설들을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 연구를 점진적으로 심화시켜야 한다. 서복연구는 한·중·일 3국학계의 공동관심사로 고대 동아시아역사 정립에 일조를 해야 한다.

△시치다 타다키(七田忠昭·일본 사가현 요시노가리 유적 전문원) ‘사가평야에서의 중한문화 유입과 발전’
 일본의 선진문화 도래를 상징하는 것은 서복전설이다. 서복 전설이 짙게 남아있는 사가평야의 야요이 문화는 중국대륙·한반도의 수도농업과 금속문화, 그 문화에 따른 주거·집락(集落) 분묘형태 등을 받아들였고 그 후에도 교역이나 외교를 통해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일본 국내의 서복상륙 설화지의 다수가 흑조라고 불리는 해류에 따른 지역에 존재한다. 요시노가리 유적, 일본 나가사키현 유적에서는 중국 본토 또는 낙랑의 한묘(漢墓)에서 사용된 목관개(木棺蓋) 유물 등 일반적인 교류에서는 입수하지 못한 문물이 출토됐다.

△카이 펭 밍(蔡豊明·상해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문화실 주임) ‘서북동도와 동아시아 문화’
 서복이란 인물과 서복전설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민중이 민족번영과 문화교류 등 여러 측면에서 공통의 욕구와 바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복은 비록 하나의 역사인물이 형상화 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동아시아 문화교류사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동아시아 각 민족의 단결과 상호협조를 위한 상징물로 변신했으며, 이러한 공통의 투철한 정신의 역사를 각종 증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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