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원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논설위원

역사에 있어서 인종의 역할은 창조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예비적이다. 잡다한 혈통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각기 다른 시기에 어떤 지역으로 들어와서 마치 성적 생식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유전 인자군(群)이 만나듯이, 그들끼리 또는 기존의 주민들과 서로 피와 전통 그리고 생활 방식을 섞는다. 그런 인종적 혼합은 세기가 흘러감에 따라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 낳을 수 있다. 이 새로운 유형이 형태를 갖출 때 독특한 문화적 표현들로서 새로운 문명을 형성한다. 사람이 문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지리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이 문화를 창조하며 그 문화가 인간 유형을 창조한다. 그리고 문명인이라면 상대가 아무리 비천하다 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적으로 기여한 각 집단의 대표자로 대함으로써 문명인임을 스스로 입증할 것이다. 

두서없이 이러한 글로 펜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제주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예멘인들의 난민신청에 대한 소식 때문이다. 법무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이 예멘인 481명(철회 뒤 출국 3명) 가운데 458명에 대해 심사한 결과, 339명의 인도적 체류를 허가하고, 34명은 단순 불인정, 85명은 심사 결정을 보류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뉴스는 전했다. 그런데 제주에 입국한 예멘인들에 대한 이러한 판단을 내리기까지 관계당국은 전국적으로 쏟아지는 관심과 무차별적인 의혹 내지 문제제기에 상당한 부담과 어려움에 직면해왔으리라는 점은 언론을 통해 전해진 각계각층의 반응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판단은 사물의 진위, 선악, 미추 등을 직관적·상상적으로 결정하는 사고 과정으로 가장 수준 높은 사고 작용이다. 판단은 평가와 거의 동일한 것일 수 있는데 평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아이디어, 작품, 방법, 소재 등의 가치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역사가의 경우는 역사 연구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판단을 한다. 먼저 어떤 문제가 연구할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고 연구를 위한 여러 사료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며 사료 간의 연결성 여부를 판단한다. 즉 자료를 해석하고, 증거에 비중을 두며, 선입관을 찾아내고, 추론을 하며, 정보에 따라서 균형 잡힌 결론을 도출할 때 합리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도덕적 판단 또한 중시된다. 모든 중요한 행위의 핵심에는 도덕적 문제가 있는데 판단에 임하는 사람은 그것을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판단의 주체는 상황의 압력과 인간 자유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에 개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주저한다.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이는 자신의 이해를 왜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가치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연한 의미로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자신의 선입관을 극복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판단의 결과들이 누적되면서 역사는 이루어진 것이다. 동시에 역사는 인류와 그들의 문제, 행동의 동기 및 원인과 결과에 대해 판단한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인지할 수 있는 배경 설명과 비판, 합리적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수반될 때 가능하다. 현명한 판단은 적절한 질문이 있을 때 가능하고, 적절한 질문은 논리적 사고로 훈련된 상상력에서 나온다. 판단을 내리는 이는 과거를 통해 제시된 사실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분석해야할 뿐만 아니라 유의미한 판단의 근거에 대한 타당성 있는 설명과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판단을 함에 있어 준거가 되는 중요한 항목들은 법률가들이 어떠한 상황에 대해 내리는 판단의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제주에 상륙하여 난민자격을 신청한 예멘인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 중 그 누구도 난민의 지위를 얻지는 못했지만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은 예멘인들 모두가 문명인의 일원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잘 적응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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