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경찰관 2명이 교문을 들어선다. 체육시간에 교사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학생의 신고가 있어서란다. 젊은 경찰관들에게 조심스레 한소리했다. 학생이 수업 중에 교사에게 체벌을 받았기로서니 그걸 민원이라고 학교에까지 출동한다는 게 과연 바람직하냐고 말이다. 그래도 민원은 민원이니까 출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경찰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학생과 교사를 직접 만나 조사하겠다는 경찰들에게, 교감인 내가 교육적으로 잘 처리할테니 학교를 믿고 돌아가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경찰들은 개운찮은 듯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알고보니 체육복을 착용하지 않은 몇 학생들을 회초리로 몇 대씩 체벌을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신고한 것이다. 이것이 어언 20년 전 어느 고등학교의 상황이고 보면 교단이 이처럼 힘들어지게 된 것이 비단 어제 오늘이 일이 아닌 셈이다.

지난 주 신문보도에 의하면 모 초등학교에서 학교폭력 사안과 관련해 정당하게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1년 여간 무려 100여 건의 고소·소송·민원을 제기하는 한 학부모로 인해 학교운영이 사실상 마비되고 교원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병가와 정신과 치료를 받다 못해 심지어는 전보까지 신청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전국17개 시·도교총이 도교육청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며 제주도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젊은이들의 직업선호도에서 교직이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고 한다. 이 고무적인 현상에 왠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저들이 정녕 교육의 본질과 교직의 특성을 이해해서일까. 아니면 교직의 안정성에 더 매력을 느껴서일까. 교육과 교육자가 존중되는 사회는 곧 선진복지국가요 성숙한 사회이기에 부디 이런 추세가 지속되기를 기대해본다. 

흔히들 학교는 우리가 아는 게 전부인 줄 알지만 사실 학교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제도권의 각급학교 이외에도, 우선 '가정(Home)이라는 학교'가 있다. 영·미권에서는 초등학교를 '프라이머리(Primary) 또는 엘리멘트리 스쿨(Elementary School)'이라고 한다. '기초학교'란 뜻이다. 그러나 실은 초등학교 이전 단계인 가정이야말로 기본·기초학교다. 이 가정학교의 교육과정은 바로 '밥상머리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사회(Society)라는 학교'가 있다. 그래서 '사회는 보다 큰 학교'라는 말이 있다. 이 학교의 규모는 작게는 지역사회일 수도 있고 크게는 국가단위일 수도 있다. 이 학교의 교육과정은 '사회규범과 시민의식'이라 할 수 있고 교육의 질은 그 사회의 성숙도에 비례한다. 

이로써 '가정'이란 학교의 교사는 부모이고 '사회'라는 학교의 교사는 사회 구성원이자 기성세대인 바로 우리다. 솔직히 여러분은 우리 가정이 학교요 부모인 내가 교사이며, 우리사회가 학교이고 모든 시민이 교사라는 사실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가. 

학교폭력 문제 역시 그렇다. 지금처럼 학교에만 전담시키는 프레임으로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학교폭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됐을까. 부모와 자식은 서로가 마주보는 양방향 거울이다. 사실이 이런대도 교육을 경홀(輕忽)히 여기는 이들이 적잖다. 학교와 교사를 상대로 경우 없이 처신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바로 그걸 내 자녀들이 보고 배우는대도 말이다. 이제 '사회라는 학교'가 나설 때다. 학교폭력 문제도 항구적인 '사회공안시스템'을 제도적으로 구축함으로써 해법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협력(cooperation)'이 아닌 '담당(responsibility)' 시스템이어야 한다. 상당수 선진국들의 사례도 그렇다. 오늘날의 학교폭력은 인성지도 운운하며 학교를 탓할 단계를 넘어선 지 한참 됐다. 사회의 인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학교폭력 문제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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