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논설위원

한 달 전 장류진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이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했다. '창작과비평'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개된 뒤 2주 만에 15만명이 찾아 읽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보통신기술(IT)업계에서 7년을 일해온 작가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오너들의 '갑질'과 피아니스트 조성진이나 레고 컬렉션 같은 을들의 '덕질'을 잘 버무린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극사실주의 호러 다큐' '판교 스타트업 일기' 등의 감상을 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도는 걸 깔깔대고 읽은 뒤 제목을 오래 들여다봤다. 일의 기쁨과 슬픔, 작가는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동명 에세이에서 제목을 따 왔다"고 말했다.

새로운 일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세상에 없던 직업과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을 하는 이들의 모임이 여기저기에서 열린다. 기존에 존재하는 일들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가 더 이상 충분히 생산되지 않는 데다 무엇보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중시하고 여가와 여행을 즐기는 '요즘 것들'의 삶의 방식에 맞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찾는 문제에 집중한다. 돈만을 위한 일은 슬프다. 일이란 깨어있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점유하는 물건이다. 그 일을 하며 자아를 실현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까. 전문가들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취향에 일치하지 않는 일을 거부하는 첫 번째 세대가 등장했다"고 분석한다. 가수 이효리가 보여준 '마음 가는대로 살고 아무나 되는 것'이 이 세대의 꿈이다. 일본에는 정규직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로만 생활을 영위하는 프리터족이라는 것이 있다는 데 놀란 것이 한 세대 전이다. 밀레니얼 세대 역시 기왕 존재하던 직업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을 하거나 수많은 직업을 동시에 영위하는 'N잡러'로서의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밀레니얼만이 아니다. 그래서 시대정신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됐다. 한 달 전 문을 연 제주과학문화공간 '별곶'에 모여든 팀원들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프로 이직러'들이다. 

미디어 디렉터 이씨는 그 좋다는 삼성전자를 나와 사진을 배우겠다고 무작정 영국으로 건너갔다. 오전 10시 출근길에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오후 4시에는 딸과 함께 퇴근하는 아빠이기도 하다. 드론도 날리고 홈페이지도 만들며 요리도 하고 꽃꽂이도 한다. 

공채 방송인으로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제주국제학교의 국어교사로, 다시 별곶 미디어 디렉터로 합류한 성씨도 재미있다. 그는 싱어송라이터, 요리사, 카페 주인 등 히피에 가까운 친구들과 대안가족같은 커뮤니티를 이루어 살아간다. 설날, 추석 같은 명절도 가족 대신 친구들과 보낸다. 그의 문화와 나의 문화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낀다. 합해지고 싶어서 맹렬하게 부러워하고 있다. 

생물학을 전공하고 바리스타와 캘리그래퍼 등으로 활동해 온 공간 매니저 김씨도 평범하지 않다. 출근길에 오름 하나 오르고 나타나는 사람이 보통은 아닌 것이다. 제주라는 공간 자체의 에너지가 직선의 삶을 사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부터 여러 직과 업을 오가며 갈짓자로 뱀의 길, 이무기의 길을 걸어왔다. 얼마 전까지는 성공의 길을 걷지 못한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듣는 질문의 결이 달라졌다. '그 좋다는 직장을 왜 그만뒀는지'가 아니었다. '어떻게 그만둘 용기를 갖게 됐는지'였다. 포기가 아니라 용기에 있다. 

요즘에는 '또라이'들을 자주 만난다. 범생이는 범생이를 부르고 또라이는 또라이를 끌어당긴다. 잘 그만둬야 잘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이다. "어차피 100살까지 사는 세상, 수없이 표류하고 탐험할 테니", '범생이' 시절 알던 뱀띠 말띠 친구들의 얼굴이 점점 삶에 찌들어갈 때, 또라이로 커밍아웃하며 새로 사귄 친구들은 더 젊고 행복해 보인다. 피부과나 성형외과가 하지 못하는 일을 새로운 일과 동료들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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