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주 제주에코푸드 대표·논설위원

제주의 옛 성안은 상업의 도읍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관덕정 주변은 매우 번화하고 음주문화가 꽃피었다. 봄에는 하얀 귤꽃으로 향이 가득하고 가을 오고 겨울 들면 짓 노랗게 익어가는 귤색으로 물들었다. 관덕정 안으로 들어가면 큰 들보에 감귤 그림이 나타난다. 화면 좌측에 ‘취하여 양주를 지나가니 귤이 수레에 가득 찼네’(醉過揚州橘滿車)라는 제목이 보인다. 성 위로 머리를 내민 기녀 십여 명 손에는 감귤이 들려있다. 그리고 관모를 쓴 한 관료가 술에 얼큰하게 취한 듯 가마를 타고 지나간다. 여인들이 그 남자를 향해 귤을 던지는데 수레에는 귤이 가득하다. 제주 화공이 목관아 주변을 배경 삼아 당나라 말기 낭만 시인 ‘작은 두보’ (두목)의 모습을 빗대어 그렸다. 이무렵 성안에서 감귤은 권력자와 함께 했음을 알게 한다.

달콤한 감귤 로맨스는 고려 무신정권 때 무신 최비의 러브스토리에도 등장한다. 최비는 용모가 출중하여 궁녀들에게 인기 짱이었다. 태자가 총애하는 한 여인이 궁궐 담 안에서 최비를 향해 귤을 던지며 사랑을 전했다. 서로 사랑하다 발각되어 간통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무인 실세인 이의민의 도움으로 벌을 면했다. 분한 태자는 그 여인을 절로 보내 비구니가 되게 했다. 그럼에도 최비는 여전히 그녀와 몰래 사랑을 나누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권의 수장 최충헌은 그를 먼 남쪽으로 귀양 보냈다. 소통이 막혀 애절한 감귤 로맨스는 단절되고 말았다.

달콤새콤한 감귤이야기는 문학작품에도 여럿 등장한다. 조선 초 최부(1454~1504)가 남긴 표해록이 유명하다. 그가 제주에서 나주로 행하던 중 배가 13일 동안 표류하여 중국 강남지역에 도달한 이야기다. 풍랑을 만나 식수가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배에 한 칸에 실어두었던 감귤을 꺼내 새콤한 즙으로 갈증을 막았다. 새콤한 신맛 성분이 타들어가는 침을 분비시켰던 것이다. 한 갑씩 떼어먹던 귤도 얼마가지 않아 바닥이 났다. 마침내 천우신조로 비가 내려 갈증이 풀렸다. 감귤이 없었다면 수분부족으로 아마 큰 화를 입었을 뻔한 일이었다.

조선 초 집현전 박사 서거정(1420~1488)도 감귤의 새콤달콤을 노래했다. 제주에서 고충추가 보낸 귤을 받고 ‘소반 가득한 노란 감귤 진중한데/살펴보니 하나하나 황금 탄환이 구르는구려/십 년 동안 길이 상여의 소갈증 앓던 차에/살살 씹으니 놀라워라 혀에 파도가 이누나’라고 읊었다. 그는 당뇨병이 심해 잦은 소변으로 소갈증이 심했던 듯싶다. 목마름이 가득한 입안에서 새콤한 과즙이 터져 나오니 속이 후련했으리라. 서귀포가 낳은 유자꽃마을 시인 김광협은 ‘먹어보게 먹어보게/입에선 신물이 남쩌/먹어보난 ᄃᆞᆯ콤 시우룽/시우룽ᄒᆞ멍 ᄃᆞᆯ콤ᄒᆞᆫ 것이/좋다 좋다 맛이 좋다’라고 제주어로 달콤새콤한 사이다 귤시를 지었다.

제주감귤의 인문학 자원은 무궁무진하다. 종교의식에 제수로도 필수다. 집집마다 제물로 쓸 흠 없는 감귤을 골라두었다. 특히 정월대보름 제주 여인들은 귤이 든 제물구덕을 지고 본향당에 간다. 귤과 돌레떡을 차롱에 차리고 메밥에 숟가락을 꼽아 할망신과 소통한다. 주렁주렁 달린 황금귤은 부·행운 그리고 자손번창·소통을 상징한다.

보름 전 농업인의 날 감귤 200톤을 북한에 보냈다. 이를 두고 한 정치인은 ‘귤화위지’라 하며 비하했다. 귤은 회수 지역 남쪽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북쪽에 가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다른 한 사람은 박스에 귤만 들어있겠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도민들은 감귤이 한라에서 백두까지 분단의 장벽을 넘어 소통이 되길 소망한다. 머지않아 압록강을 넘어 몽골 울란바타르를 찍고 유라시아로 연결된 유럽행 철도와 손잡게 되리라 믿는다. 서울역에서 유라시아행 기차티켓을 끊고 ‘나의 살던 제2나라’ 통일 독일로 가는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